[광화문에서/김창혁]公職者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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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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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잡은 주말 골프 약속이었지만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천안함 참사와 태안에서 발생한 농림수산식품부 공무원들의 참변 소식에 심사(心思)가 어지럽던 차였다. 집에서 미적거리고 있는데 자리를 주선한 K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말 미안한데, 도저히 안 되겠다.” 아무리 고교 후배라도 당일 아침 운동 약속을 취소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K 선배는 정부 고위 공직자다. 흔히 말하는 ‘유관 부처’ 공직자여서 부랴부랴 약속 취소 전화를 건 것은 아니다. 국무총리실에서 전 공무원의 유선상(有線上) 대기 지시가 떨어져서만도 아니다. 그냥 공직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 차관과 실·국장, 주요 과장들도 ‘한 지붕 두 가족(옛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 출신들)’의 단합을 위해 춘천까지 갔다가 급히 되돌아왔다고 한다. 어디 교과부뿐이겠는가.

유별난 지정학적 위치와 남북 분단 상황,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압축성장 과정에서 몸에 배고 복제돼 내려온 특유의 전사형(戰士型) 공직 DNA.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모두 퇴화해버린 줄 알았던 그 DNA의 흔적을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아 무거운 마음에도 내심 안도했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부 때 가장 실망스러웠던 건 좌파정권이라거나, 막말정권이어서가 아니었다.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바로 그 대한민국 공직 DNA에 대한 노골적인 파괴행위 때문이었다. 북한이 대규모 미사일 발사실험을 했는데도, 대통령은 오전 5시에 보고를 받았다는데도, 안보장관회의는 오전 11시나 돼서야 열렸다. 심지어 대통령은 그 회의도 주재하지 않았다. 마치 미국 대통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건 위기에 대한 인식차도 뭣도 아니었다. 정부란, 공직이란, 공직자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최고 공직자의 공공연한 냉소였을 뿐이다.

그때 국무총리가 한명숙 씨였다. 김대중 정부 때 여성부 장관, 노무현 정부 때 환경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한 씨의 경우는 냉소 그 자체다. 1000만 원에 가까운 골프채 세트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직 장관이 대낮에 ‘업자(業者)’ 비슷한 사람과 골프숍에 드나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유죄다. 광화문이나 정부과천청사 공무원들이 배심원이라면 분명 “유죄!”라고 했을 것이다.

재판장은 골프채를 사줬다는 곽영욱 씨에게 “수요일 근무하는 날 장관하는 사람이 나와서 골프채를 풀세트로 사서 갔다? 이상해…. 배달시켰나요?”라고 물었다 한다. 곽 씨의 증언이 아무래도 미심쩍어 그렇게 되물었을 것이다.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5만 달러를 받고 안 받고 간에 그런 사람을 총리 공관에 버젓이 불렀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답은 하나다. 재판장이, 아니 국민 모두가 그 정도 공직자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공직 유전자가 그에겐 없었던 것이다.

밀실에서 이뤄진 뇌물거래는 추상(秋霜)같은 사법의 메스로 환부를 도려내면 된다. 그러나 한명숙류(類)의 공직 DNA 결핍증은 치유가 어려울 뿐 아니라 그냥 두면 어디로 전이(轉移)될지 모르는 악성종양이다. 그런 사람이 다시 서울시장직에 나서겠다고 하니, 종양의 뿌리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다.

김창혁 교육복지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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