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한나라당의 원죄

  • Array
  • 입력 2010년 3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서청원 전 미래희망연대 대표가 24일 한나라당과의 합당을 선언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기억의 시계는 13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1997년 11월 21일 한나라당 창당.

한나라당은 출발부터 선거용 합당으로 만들어진 정당이었다.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미래희망연대와 합당을 추진하거나 소속 의원들을 끌어온다고 해도 새로운 일은 아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 성사되자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도 조순을 대선후보로 내세운 통합민주당과 합당했다. 합당 결과 조순 후보는 자신이 작명한 한나라당의 총재,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후보가 됐지만 결과는 쓰라린 대선 패배였다.

하기야 신한국당의 모태였던 민자당도 1992년 총선과 대선 승리를 위한 ‘3당 합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산물이었다. 선거용 합당은 한나라당의 태생적 원죄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선거 때마다 ‘이기고 보자’식 무원칙한 영입으로 한나라당에는 △선거 때 맞붙었던 여야 정치인 △반목했던 보수세력과 재야세력 △운동권과 그들을 구속했던 공안 출신이 모두 동거하는 기막힌 현상이 벌어졌다.

1997년 15대 대선 때 여당, 2002년 16대 대선 때 원내 제1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참패한 것은 이회창 후보의 개인적인 문제 못지않게 ‘선거용 난혼(亂婚)’에서 비롯된 적전분열(敵前分裂)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무현 정권 때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 신행정도시법, 신문·방송법 등 주요법안에 한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도 그 같은 원죄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여대야소 환경에서조차 세종시 문제를 비롯해 4대강 개발, 미디어산업 개혁 등 어느 것 하나 힘 있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것도 근원을 들여다보면 난혼의 원죄가 있다.

여기에다 2008년 총선 직후 탈당했던 친박계 의원들을 일괄 복당시킨 것도 결국 당의 구심력만 떨어뜨렸다. 쫓아낸 이들과 쫓겨났던 이들이 동거하는 정당…. 같은 당원으로서 소속감과 동질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이들이 복당하면서 더욱 무거워진 당은 동력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구 정당도 선거 때 일시적으로 우파는 우파끼리, 좌파는 좌파끼리 연합을 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정체성과 뿌리가 다른 정당끼리 합당이나 결합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선거용 이합집산이 한나라당의 원죄만은 아니다. 선거용 창당과 합당을 서슴지 않았던 DJ의 유산을 물려받은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당이 이 모양이면 국민이 피곤하다. 적어도 노무현 정권은 새천년민주당의 틀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어 신행정도시법과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과 각종 부동산대책법 등 이른바 ‘쟁점법안’을 힘 있게 밀어붙였다. 그 방향의 옳고 그름은 떠나서 말이다.

다이어트를 해 동력을 키워도 시원찮은 마당에 나머지 친박 의원들까지 받아주겠다는 건 선거 때만 되면 세(勢)에 기대려는 ‘웰빙 한나라당’의 고질병이다. 몸만 키운다고 강해지지 않는 건 사람이든 정치든 마찬가지다.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