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선주]대법관 증원보다 상고 줄게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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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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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대법원의 과중한 업무부담과 사건처리 지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법관 수를 14명에서 24명으로 늘리겠다고 한다.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보장하는 취지라고 한다. 대법관의 증원이 상고심으로서 대법원의 역할과 기능을 개선하는 방안으로서 효율적이고 적절한가.

대법원의 업무가 과중한 것은 사실이다. 2009년 상고사건 수는 3만2000여 건으로 대법관 1인이 1년에 2700여 건을 처리해야 하는 실정이다. 대법원의 업무가 비상식적으로 과중하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재의 상고사건 수를 당연한 전제로 삼아 업무를 경감하는 데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진정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상고심인 대법원이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적 장치가 뒷받침돼야 하는지가 우선해야 한다.

대법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과 역할은 하급심 법원처럼 사실문제를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법령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데 통일을 기하는 일이다. 그래서 상고심을 법률심으로 하고 최고법원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이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법원이 법률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을 깊이 있게 다루어 통일적인 법적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대법관 수를 늘림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법관 수의 증가는 재정적 측면 등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상고심 본래의 기능과는 맞지 않다. 대법관이 많아져 재판부 수가 증대되면 될수록 통일적인 법령 적용과 해석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대법관을 10명 증원하는 방안이 대법원의 업무경감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대법관의 양적 증대가 상고심의 업무 경감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은 이미 독일에서 경험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독일연방대법원의 대법관 수는 우리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상고법원의 업무과중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대법원의 상고사건 수 증가 추세로 볼 때 10인의 대법관 증원으로 얻어지는 업무 경감 효과는 그야말로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아 불과 몇 년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대법원의 정상적인 기능 수행을 위해서는 대법원으로 오는 사건 수를 먼저 통제해야 한다. 상고 자체를 제한하여 대법원이 중요한 법률 문제가 있는 사건을 집중적으로 심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1980년대에 실시한 상고허가제의 경험은 이 제도가 상고의 남발을 막아 대법원의 기능 정상화에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상고 제한을 국민의 재판청구권 침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대법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법률 문제에 관해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깊이 있게 심리 판단함으로써 상고심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국민의 재판청구권이 비로소 보장된다.

직간접적으로 재판을 경험한 사람들의 가장 큰 불만은 판사 앞에서 할 얘기를 실컷 하지 못했다는 점, 판사가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얘기를 듣지 않고 내린 판결의 결론을 믿기 어렵다고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보장하려면 사건을 무작정 대법원까지 갖고 가도록 하지 말고 1심과 2심의 재판 절차를 충실히 진행해 재판 결과에 수긍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국민 개개인의 권리보호는 사실심과 항소심의 강화를 통해 이뤄져야지 대법관 수를 무작정 늘린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상고심 기능 정상화를 위해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은 하급심 강화를 전제로 한 상고 제한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대법관 수를 늘리자는 주장은 겉으로 내세운 논거와는 달리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정선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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