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민병돈]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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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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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일본에서는 20종의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우리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처단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목숨을 잃은 후 100주기에 즈음하여 그의 고향에서 이른바 ‘이토 히로부미 공 몰후(歿後) 100년 기념’으로 발행한 것이다. 거기에는 메이지 신정부의 초대 내각 총리대신과 정계의 리더로서 근대일본국 건설에 기여한 그의 공로도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일본 중앙정부에서 발행하지 않고 지방에서 한 것은 아마도 우리의 국민감정을 염두에 둔 때문인 듯하다. 우리에게는 천추에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원수이지만 저들에게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지도자요, 영웅일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쾌하게 처단한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분명 우리의 영웅이다. 그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대부호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나 청소년 시절 사냥을 즐겨 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가무도 즐기고 호방한 모습을 보이면서 성장했다. 일본의 강압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07년 고종황제 강제퇴위 및 7개조의 이른바 한일신협약 체결과 군대 해산을 보고 망해가는 조국을 뒤로 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그곳 이범윤의 의병부대 참모중장으로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투쟁에 나섰고 3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함경북도 경흥에 들어가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쾌거는 항일투쟁의 압권으로 울분에 찬 민족의 의기와 사기를 살아나게 하며 항일투쟁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했다.

안 의사의 투쟁 뒤 열강의 언론은 일본의 한국침략 야욕을 규탄했고 일본의 만주침략 야욕에 분노하던 중국인의 가슴에는 항일의 불이 붙었다. 중국인들은 “우리의 원수를 (안중근이) 대신 갚아 주었다”며 기뻐했다. 중국의 국부 쑨원 선생은 “(안중근의)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닐지라도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라며 칭송했다.

많은 중국인이 안중근을 소재로 한 시와 소설과 연극을 발표하기도 했다. 톈진 난카이(南開)대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연출하는 연극에 그의 부인이 남장하고 안중근 역을 맡아 출연하기도 했다. 중국인의 열광 정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들은 우리 항일투사에게서 자극을 받으며 한국인과의 유대감을 보였다.

더욱이 안 의사가 수감 중에,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당당한 태도와 항변, 논리 정연한 동양평화론 피력은 일본인 간수와 관리마저도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다.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일본인 재판장에게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라며 비웃고 항소도 하지 않았다.

이에 놀란 일본 정부는 법원장을 안 의사에게 보내 항소하도록 권유했지만 오히려 그는 “옳은 일을 한 것이니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며 굳은 의지를 보였다. 그의 어머니도 안 의사의 두 동생을 보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미에게 효도하는 것”이라고 일렀다. 일본과 여러 나라의 언론도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라며 놀라워했다.

몹시도 춥던 겨울이 가고 3·1절 행사에 뒤이어 26일이 오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영웅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순국 100주기가 되는 날이므로 추모우표 발행 등 거국적 추모행사를 거행할 때이다. 그런 자세가 지난날의 이때를 그냥 지나친 점을 뉘우치면서 이 나라 후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민병돈 경민대 석좌교수 전 육사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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