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님을 생각하는 시간

  • Array
  • 입력 2010년 1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명상, 이인재 그림 제공 포털아트
명상, 이인재 그림 제공 포털아트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호칭이 있습니다. 나 이외의 모든 대상이 호칭을 부여받게 됩니다. 호칭이 없으면 상대를 부를 수 없고, 상대를 부르지 못하면 허공에 말을 하는 것처럼 대화가 겉돌고 전달이 불분명해집니다. 그래서 마땅한 호칭을 정하지 못할 경우 애매하고 어정쩡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는 할아버지건 아버지건 내 앞에 있는 모든 대상을 You라고 부를 수 있지만 우리말에는 세심한 구분과 차별이 있어 무턱대고 당신이라는 이인칭 대명사만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의 당신은 삼인칭에서는 높임이 되지만 이인칭에서는 높임이 아닙니다. 손윗사람을 대하면서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까요.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부부 사이에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여보라는 말의 어원을 ‘여기+보오’ 정도로 푸는 견해가 일반적이니 상대방을 정확하게 호칭하는 게 아니라 ‘여기 보시오’나 ‘이것 보시오’ 정도로 얼버무리는 호칭입니다. ‘당신’도 높임은 아니니 부부 사이의 호칭이 참 서먹서먹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 뭔가 어색하고 계면쩍어 내외하는 풍경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우리의 호칭 문화가 너무 다양하고 복잡하다고 영어의 ‘You’를 부러워하는 사람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상대하는 모든 사람을 당신이라고 호칭한다고 가정해보면 그것이 편의적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처럼 정(情)을 중시하는 토양에서는 관계의 산성화를 몰고 올 수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당신, 자식에게도 당신, 부모에게도 당신, 선생에게도 당신, 제자에게도 당신, 선배에게도 당신이라고 부르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인터넷 세상이 열린 뒤 우리에게는 참 좋은 호칭이 하나 생겼습니다.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게 아니라 제한적으로 쓰이던 것이 아주 널리 일반적으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님’입니다. 원래는 사람 이름 뒤에 ‘씨’의 높임으로 쓰였으나 인터넷에서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이제는 그것이 우리말에 없던 ‘높임 이인칭’으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우리말 ‘님’은 오랫동안 문학에 갇히고 상징에 갇히고 각별한 존경의 의미에만 붙박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속박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호칭이 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따뜻한 부름이 되고 있다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님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은 ‘님만 님이 아니라 기른 것은 다 님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마음에 품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사물과 생명, 나아가 우주로까지 님의 의미가 연장되고 확장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님은 단지 대상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인생의 지향성과 생명활동의 궁극적 목표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대에게 님은 무엇인가요.

박상우 작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