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이주향]버려져야 찾게되는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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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문이 천국 문처럼 기분 좋게 열리는 친구들이 있다. 김치찌개 하나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와인이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술이 없어도 목마르지 않고 이야기가 마르지 않는데, 왜? 남자들이 술이 있어야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맨 정신이 자폐이기 때문이야.” 여자끼리 모여서 남자 흉보는 일도 재미있다.

누군가가 물었다. 첫 기억이 뭐냐고? 첫 기억? 그러고 보니까 뿌옇게 올라오는 그림이 있다. 엄마는 안방에서 갓 태어난 동생을 잠재우고, 아버지는 건넌방 책상 위에서 뭔가에 열중했다. 심심한 나는 아버지와 놀기 위해서 물었다. “아빠, 뭐해, 뭐해?” 내가 얼마나 보챘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선명한 것은 안방을 향해 소리 높이시던 아버지의 목소리다. “여보, 주향이 데려가지!”

충격이었다. 내 첫사랑은 ‘거절당한 사랑’이었으니까. 심리학자는 첫 기억이 인생의 열쇠라고까지 한다. 거절당한 사랑이 첫 기억인 사람의 운명은? 인간관계에서 악착스레 매달리는 일이 없는 내 성격은 거절당한 사랑의 기억이 만들어 낸 체념의 무늬인지 모르겠다. 당신의 첫 기억은 어떤가? 당신 삶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세상의 가장 깊은 곳이라면 과장일까.

그러고 보니까 나는 운명에 밀린 사람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운명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쓰러져, 쓰러진 그 자리에서 스스로를 정화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내가 만난 원형적인 인물은 버림받은 여자 하갈이었다.

젊음도 직장도 가족도 떠나고

하갈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이스마엘을 낳았으나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의 질투에 광야로 쫓겨 갔던 기막힌 여자다. 얼마나 모욕이었을까? 자신과 아들이 희망도 없이 버려졌는데. 아니, 모욕을 넘어 얼마나 절망이었을까? 생존이 문제인데. 게다가 가죽부대에 담아가지고 나온 물이 다 떨어졌는데. 살아가야 하는 곳은 사막 한가운데인데.

‘버려짐’은 인간이 통과해야 할 중요한 통과의례다. 우리는 참 많이 버려진다. 젊음이 우리를 버리고, 사랑이 우리를 버리고, 직장이 우리를 버리고, 자식이 우리를 버린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수많은 버려짐을 통과하면서 내가 되는 것인지 모른다. 성서는 천사가 하갈의 울부짖음을 듣고 눈을 열어주어 우물을 보게 됐다고 썼다. 나는 생각한다. 그 우물이야말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샘이라고. 우리에게는 누구나 내면의 샘이 있다. 내면의 생명샘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누구에게서도 버림받을 수 없는 여신이다. 물은 생명이고 치유니까.

한 친구는 여자문제로 자신을 버린 남편과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야기했다.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남편에게 무관심해졌다고 했다. 관심을 갖고 살 수 없으니까 자연히 무관심해지더라고. 3년을 그렇게 따로 따로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야말로 자기를 발견하는 시간이었다는 거다. 공부하고 노래하고 끊임없이 쓸고 닦았다. 남편 없이 살 수 있게 되니 남편과 잘살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치유했다. 그렇듯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버려졌더라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샘물을 발견하는 일이다.

실제로 하갈의 아들이 이스마엘이다. 어머니와 함께 쫓겨나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생사를 건 투쟁을 했던 이스마엘은 13억 무슬림의 뿌리다. 무슬림의 성지 메카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살던 곳이다. 메카의 카바 신전은 아브라함과 관계가 있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이 살았음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던 곳이라는 말이다. 놀랍다. 우연인 것 같지가 않다. 잊은 줄 알았던 그 땅에서 수천 년이 지나고 무하마드가 나고, 히라 동굴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교가 시작되는 일이.

스스로 버리지 않으면 치유되리

세상에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듯 운명은 잊지 않고 인과응보를 만든다. 그때 그 하갈이 아브라함가(家)에서 버려졌다고 스스로를 버렸다면 이스마엘이 살 수 있었을까. 운명의 무하마드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속에는 긴긴 세월을 살아온 조상이 있고 긴긴 세월을 살아갈 후손이 있다. 함부로 살 수 없는 이유다. 쉽게 절망할 수 없는 이유다.

기억은 고정돼 있지 않다. 삶이 변화하면 기억도 변화한다. 그렇게 첫 기억과 놀던 뒤에 TV의 한 장면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엄마를 닮아 아빠가 날 사랑합니다. 내가 아빠를 닮아 엄마가 날 사랑합니다.” 하노이의 한 초등학생이 부르는 베트남 동요였다. 그런데 그 장면과 함께 기적처럼 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나를 안고 오리가 놀던 물가를 걷던 기억! 아버지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했던 기억! 그건 기억일까, 왜곡일까? 어쨌든 기억이었고 치유였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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