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충청에 大義를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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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5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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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논란을 보면 이명박(MB) 대통령이 ‘역사와의 대화’를 제대로 시작한 것 같다. 정치적 손실을 감내하고라도 역사와 미래 앞에 떳떳하고자 하는 진정성이 엿보인다. 문제는 역사와의 대화에 몰두하다 보면 너절하고 구차한 현실정치를 가벼이 볼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선의와 진정성만으로는 세상을 움직이지 못한다. 어떤 정책이든 정치적 합의를 이뤄내고, 법률로 구현되지 않으면 집행이 불가능하다. 포석과 수순의 면밀함, 조정과 타협의 역량이 필요하다.

명분의 대립, 이익의 대립

MB는 수도분할에 따른 행정 비효율을 문제 삼아 세종시 수정론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GH) 전 한나라당 대표는 신뢰의 문제로 맞섰다. ‘이익(효율) 대 원칙(신뢰)’의 대립구도에서 이익은 원칙을 이길 재간이 없다. 이 때문에 MB도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명분으로 갈아탔다. 이제 책임 대 신뢰, 즉 명분 대 명분의 구도가 된 것이다.

민주화와 함께 우리 사회는 ‘투쟁의 시대’에서 ‘분쟁의 시대’로 넘어왔다. 이런 환경에서 갈등은 통상 이익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세종시와 관련해 GH의 마음에도 신뢰라는 명분 못지않게 충청표심에 대한 계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갈등이 진행되면서 조만간 이익충돌은 명분대립 구도로 전환된다. 문제는 이럴 경우 ‘참과 거짓’의 대결이라는 모양새가 돼 서로 양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 타협을 이뤄내려면 다시 ‘이익 대 이익’의 구도로 환원돼야 한다. 그래야 퇴로가 열리고 상생도 가능하다.

하지만 환원의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다. 우선 상대의 체면부터 살려줘야 한다. 그래야 대화와 협상이 가능하다. 강영진 성균관대 교수(갈등해결학)는 저서 ‘갈등해결의 지혜’에서 “쓰레기매립장 등 국내의 님비분쟁 실태를 조사한 결과 시골주민들이 행정당국에 장기간 맞서 싸운 근본 이유는 환경위험이나 보상액수가 아니라 자존심 손상, 공정성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촌로들은 일방적으로 매립장 용지를 선정·통보했다는 점, ‘우리를 얕보아 그런다’는 느낌에 화가 난 것이다.

세종시 논란에서도 핵심은 충청의 자존심이다. 이 인화성 물질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원안과 수정안 중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2차적 문제가 돼 버렸다. 정부는 연기·공주 주민과의 대화로 첫 수를 뒀어야 했다. 마음이 상한 후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됐다. 비록 늦어버렸지만 이제라도 충청인들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는 1월 초 수정안을 제시할 방침이지만 이 제안이 수용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내용 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절차이며 경로다.

‘가는 데까지 가보고 정 안 되면 회군하자’는 생각이 아니라면 △대표성이 충분하고 △합리적이며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지역대표들을 선발해 민관합동위의 대안도출 과정에 참여시켜야 한다.

충청을 대안 마련에 동참시켜야
충청권 ‘출신’이 아니라 ‘지역 대표’가 의사결정에 동참해야 한다. 그래야 주민들이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일방적인 설득은 불가능한 상황임을 정부도 받아들여야 한다. 총리가 몇 번을 내려가도 안 된다. 충청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으면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GH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국회에서의 해결은 무망하다.

가장 좋은 경로는 충청이 주도적으로 대의(大義)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논의가 행정효율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부족하다. 통일한국의 수도, 국가의 먼 미래에 대한 담론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먼저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라. 이익 문제로의 환원, 그에 따른 타협 등은 그 다음이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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