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경제검찰과 경제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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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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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가 경제검찰이라는 것은 옳은 비유가 아니다. 평상시 공정위는 기업들이 벌벌 떨 만큼 힘이 센 조직이 아니다. 국세청처럼 기업의 자금 흐름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세무조사를 벌여 엄청난 세금을 때릴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은행 증권사 보험사 같은 금융회사들이 금융감독원을 두려워하는 것은 금감원이 감독권과 검사권에 더해 임직원 징계권까지 갖고 있기 때문인데, 공정위에는 그런 권한이 없다.

기업들의 불공정거래를 적발해 물리는 과징금과 서면으로 이뤄지는 경고, 시정명령 정도가 공정위가 갖고 있는 무기다. 그나마 공정위의 조사권은 강제력이 없어 기업이 협조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면 계획대로 조사를 진행하기도 쉽지 않다.

공정위가 본래 힘이 약했던 부처는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재계의 원망이 집중된 곳이 공정위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출자총액제한제를 비롯한 대기업 규제가, 노무현 정부에서는 비판언론 옥죄기의 상징인 신문고시가 일감을 몰아줬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사정이 바뀌었다. 출자총액제한제는 기업 투자 위축의 주범으로 지목된 끝에 폐지됐고 신문고시도 정치권력의 빗나간 언론통제라는 오점을 남기고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무기를 내려놓고 난 뒤 공정위의 파워는 오히려 더 세졌다. 역설적으로 시장 경쟁질서 감시라는 본연의 업무로 눈을 돌렸기에 가능했다. 기업들은 이제 정호열 위원장의 발언에 담긴 속뜻을 읽어내느라 신경을 곤두세운다. 공정위가 담합조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면 해당 업계는 바짝 긴장한다. 공정위가 타깃으로 겨냥한 업종은 액화석유가스(LPG), 주유소, 소주, 대학(등록금), 항공사, 온라인 음악서비스 등 전방위에 걸쳐 있다. 소비자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분야여서 여론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힘의 불균형이 심한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서 소비자 주권을 지킨다는 명분까지 업고 있다.

정 위원장은 기업의 담합행위가 화제에 오르면 학자 출신답지 않게 ‘괴멸적 타격’이라는 전투용어를 쓰곤 한다. 대기업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시장질서를 해치는 반칙에 대해서는 회생이 힘들 정도의 초강력 제재를 가해 담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LPG 업계에 ‘사상 최대의 과징금’이 부과될 것이라는 얘기가 퍼진 것만으로도 이미 효과를 낸 셈이다.

공정위는 담합 제재로 가격 하락 효과가 생기면 그 혜택이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목적과 결과가 뒤바뀌거나 헷갈리는 사례가 되풀이되면 제재의 권위는 훼손된다. 물가잡기는 담합에 대한 제재를 통해 생기는 결과일 뿐이지 담합 단속의 목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9월 서울 남대문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석유제품 원가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공정위는 6일 뒤 ‘메이저 4개 회사의 과점(寡占) 체제인 국내 석유시장의 경쟁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지금 담합조사를 받는 회사 중 상당수는 정부의 물가안정 시책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괘씸죄’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으면 과징금 부과의 정당성도 퇴색할 수밖에 없다.

공정거래법은 공정위에 물가안정 책임을 맡기지 않았다. 공정위는 경제검찰로 행세할 이유도, 물가잡기에 팔을 걷어붙일 필요도 없다. 시장경제 파수꾼으로 충분하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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