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안전벨트 바나나 사형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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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3일 20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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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벨트, 충격흡수엔진룸, 안전유리 등 차량 안전장치를 이용하면 교통사고 시 운전자의 사망확률이 낮아진다. 자신의 사망확률(비용)이 내려가면 운전자는 속도가 주는 만족감(편익)을 선택할 인센티브가 생긴다. 안전장치를 믿고 과속하다가 사고를 자주 낼 수도 있는 것. 그렇다면 안전장치는 사망운전자 수를 줄일까 늘릴까. 1975년 샘 펠츠먼 미국 시카고대 교수(경제학)는 안전장치 의무화의 효과를 실증 분석했다.

인센티브의 잔인한 진실

놀랍게도 결론은 “양 방향 효과의 크기가 거의 같아 사망운전자의 증감은 서로 상쇄된다”는 것이었다. 펠츠먼은 나아가 “사망운전자 수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길을 걷다 차에 치여 죽는 사람의 수는 늘어났다”는 섬뜩한 결과까지 내놓았다. 보행자의 경우 과속의 피해를 보면서도 안전장치의 혜택은 못 받기 때문이다. 놀란 미국 정부는 속도제한 강화 등 보완책을 마련했다.

‘경제학자가 이런 연구까지 하나’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경제학은 이 같은 분석에 아주 능하다. 경제학은 인센티브(유인구조)를 다루는 학문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인센티브에 반응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측정하는 통계처리 도구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법경제학은 ‘법을 운용할 때도 인센티브를 잘 따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대형할인점에서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전치 8주의 상처를 입고 24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주모 씨(38) 사건에 대해 올 7월 대전지법은 “할인점이 70%의 책임을 지라”고 판결했다. 주 씨는 바나나 시식코너 옆을 지나던 중 넘어졌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등산하다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진 경우에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올까. 그렇지 않다. 많은 손님이 오가는 제한된 공간에서는 청결한 바닥 유지에 따른 편익이 청소비용보다 훨씬 크다. 청결 관리를 유도하는 장치를 만들 이유가 충분한 것. 반면 지리산 등산로를 매장 바닥처럼 관리한다면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런 인센티브는 필요 없다. 매장-지리산의 예에서 보듯 인센티브는 더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도록 디자인돼야 한다.

지난달 하순 천주교 불교 개신교 원불교 등 4대 종단 대표들이 정부와 국회에 사형제 폐지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김부겸 의원도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유영철 강호순 조두순 등의 극악무도한 행적이 기억에 선명한 때라 이 움직임은 더 눈길을 끌었다.

필자 생각에 사형존치론과 폐지론의 논지는 모두 귀 기울일 만하다. 하나만 제외한다면…. “사형엔 범죄를 예방하는 기능이 없거나, 입증되지 않았다”는 폐지론 측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정말 그럴까. 왜 사형엔 다른 징벌과 달리 범죄예방 효과가 없다는 걸까.

이런 시비를 가리는 것이 인센티브 분석의 특기다. 주로 미국에서 이뤄진 연구지만 경제학자들의 견해는 이 주장과 다르다. “사형집행 1건당 살인이 7, 8건쯤 줄었다”는 것이 숱한 논문의 일관된 결론이다.

죽지 않을 수 있는 시민 7, 8명

물론 살인이 줄어든 것은 사형이라는 결과를 피하고 싶어서일 게다. 거꾸로 사형제를 폐지한 주(州)에서는 살인이 그만큼 늘어났다. 이 연구의 선구자인 버펄로대의 아이작 에를리히 교수는 스스로 열렬한 사형폐지론자였지만 논문에서는 동일한 결론을 냈다. 살인자들도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상식과 일치하는 결과였다.

필자는 청년시절 사형제도에 반대했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정권의 사법살인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런 염려가 사라진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사실 사형수 중에는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을 굳이 극형에 처할 필요가 있느냐’는 고뇌가 따른다. 공감한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다른 고려사항보다는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시민 7, 8명의 목숨이 여전히 더 커 보인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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