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권희]전기자동차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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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9일 17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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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GM은 지난 20년간 전기자동차 세 종류를 개발 후 폐기했다. 1990년 GM의 협력업체가 만든 ‘임팩트’는 1994년 소비자 시험운행에 1∼2주 투입됐다. GM 이름이 붙은 첫 전기자동차 EV1은 1996년 ‘젠1(1세대)’, 1999년 ‘젠2(2세대)’로 점차 개량돼 희망자에게 2년간 임대됐다.

GM은 소비자와 전문가들의 높은 평가와는 달리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하다”고 봤다. 그러면서 캘리포니아 대기보전국(CARB)의 무공해차(ZEV) 보급 규제를 연기 또는 폐지해 달라는 소송을 2002년에 냈다. CARB의 규제는 자동차 매연으로 골치를 썩이던 캘리포니아 주가 임팩트에 반해 미국의 7대 자동차 메이커가 무공해차 비중을 1998년 2%, 2001년 5%, 2003년 10%까지 높이도록 한 것이었다.

2003년 말 당시 릭 왜거너 GM 회장은 EV1 프로젝트를 공식 취소했다. GM은 “이익을 낼 만큼 전기자동차를 팔 수 없을 것 같다”고 발표하면서 스스로 ‘EV1은 실패작’이라고 떠벌렸다. 시험운행에 쓰인 임팩트 50대를 박살낸 경험이 있는 GM은 EV1 수백 대를 회수해 압착기로 납작하게 눌러버렸다. 일부만이 ‘길에 나다니지 못하게 한다’는 조건 아래 박물관이나 학교에 보내졌다. 덩달아 CARB의 규제도 시행 유보, 완화, 타협의 길을 걷는다.

올해 3월 GM에 대한 정부 자금지원의 조건으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왜거너 회장은 “재임 중 최악의 결정은 EV1을 박살낸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GM의 환경 중시) 이미지가 나빠졌다”고 말했지만 평론가들은 “그의 도끼질에 날아간 것은 GM의 미래”라고 평가했다.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로 군림하던 GM은 전기자동차 대신 대형차와 SUV에 매달리다 파산보호 신청의 치욕을 겪기에 이르렀다.

전기자동차 개발의 선두에 섰던 GM은 왜 스스로 도끼질을 했을까. 이를 밝혀줄 내부문서 등 증거물은 공개된 게 없다. 크리스 페인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나(Who killed the electric car?·2006년)’에는 찌그러진 EV1이 켜켜이 쌓여 있는 장면과 연구개발진 등의 의혹 제기 증언이 나온다. 지구환경을 구할 획기적 발명품인 전기자동차가 미국 석유업체와 정부, 심지어 자동차메이커들까지 결탁한 검은 커넥션에 희생됐다는 암시다.

이명박 대통령이 전기자동차 양산(量産)을 2011년으로 2년 앞당기는 등 청사진을 내놓았다. 과거 GM이 한계를 느꼈던 배터리 분야에서 LG와 SK 등이 세계 수위권이어서 국내 업계가 도전해볼 만하다.

국내 자동차업계가 현재의 시장지위를 더 누리고 싶어 전기자동차 조기 도입에 부정적이라면 GM처럼 비싼 수업료를 치를 수 있다. 외국 업체들이 그 공백을 구경만 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선두권에서 약간 밀려 있는 각국 자동차메이커들은 전기전자 업체와 손잡고 추월과 역전을 꿈꾼다. 기름이나 엔진자동차 또는 특정 부품을 더 오래 팔아먹기 위한 전기자동차 죽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1975년 세계적인 필름업체 코닥이 토스터 크기의 디지털카메라를 처음으로 발명했다. 엔지니어 스티븐 새슨의 보고에 경영진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 참 귀엽군.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는 말게.” 코닥은 소니 등이 1980년대 초 디지털카메라로 치고 나간 뒤 시장을 따라잡느라 사업구조조정 등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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