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권지예]젊은 축구, 졌지만 행복했다

  • 입력 2009년 10월 13일 02시 49분


코멘트
이상한 일이었다. 경기가 막바지에 가까울수록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휘슬이 울리는 순간 안타깝게도 경기는 끝났다. 딱 10분만 더 했으면 꼭 이길 것 같은 생각이 간절할 때였다. 내달리던 붉은 유니폼의 어린 선수들이 머리를 감싸거나 잔디에 드러누웠다. 무릎을 감싸안고 울다 고개를 든 어느 선수의 눈물을 보는 순간, 내 눈에서도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마치 봉숭아 씨앗이 터지듯이. 동시에 가슴엔 무언가 고요하지만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12일) 귀국한 젊은 태극전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계속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미안하고 고마운 청소년축구

이번 경기, 참 이상했다. 졌는데 욕도 안 나오고 눈물이 툭 터져 나오다니. 분한 눈물이 아니라 ‘행복의 눈물’이었다. 졌는데도 행복했다. 이기면 더 좋았겠지만, 졌어도 당당하고 아름답고 멋졌다. 오랜만에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투혼이 살아 있는 진짜 땀 냄새 나는 멋진 플레이를 봤다. 작품성과 연기가 훌륭한 공연을 본 것처럼 벅차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며칠 전 이집트 수에즈에서 열린 가나와의 선전 끝에 아쉽게도 4강 입성이 좌절된 20세 이하 세계청소년 월드컵대회의 이야기다.

실은 나는 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002년 월드컵 덕분에 익힌 몇몇 스타 선수 이외에는 요즘 선수 얼굴도 잘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만 스무 살도 채 안 된 내 아들 같은, 낯선 청년들이 뛰는 이번 대회는 처음부터 별 관심도 없었다. 그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스타선수 출신의 홍명보뿐이었다. 이 앳된 선수들의 감독이라고 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고맙게도 그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워주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히딩크 감독에게 명장이라고 찬사를 보냈듯이, 이 젊은 감독에게 사람들이 찬사를 보낸다. 아직 프로 근성도 없는 어린 조랑말 같은 무명 선수들을 이 정도로 조련한 자질과 인격을 보고 ‘기 살리는’ 신세대 지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지도자로서 먼저 가르친 것이 축구에 대한 올바른 자세와 의사소통이었다고 한다. 그 다음에 축구하는 방법을 가르쳤노라고 했다. 선수들은 그가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고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했다.

축구는 사람이 모여서 한다. 아무리 고도의 테크닉이 판을 치는 21세기라 하더라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진실한 소통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신감을 일깨워주며 잠재력을 끌어내고야 만다. 독재자 같은 무서운 리더보다는 신세대 젊은이들에겐 형님 같은 인간적인 지도자가 더 어필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집트 경기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감독과 선수, 젊은 그들에게서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눈물이 희망의 씨앗이기 때문이었다. 예전보다 선수의 신체조건과 체력과 기량이 더 좋아졌으며, 그들의 가슴속에는 샘물 같은, 용광로 같은 잠재력과 열정이 들끓었다. 게다가 에너지를 꽃피우게 하는 좋은 지도자도 있다. 그 희망이 한국축구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꿈꾸게 한다.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진실한 소통, 잠재력 이끌어내

이럴 때마다 매번 느끼지만 우리는 정말로 폭발적인 잠재력이 많은 민족인 것 같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늘 잠재된 가능성을 꽃피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 아니 우리는 희망의 찬란한 꽃씨를 틔우는 정원사의 손길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씨앗이 아닌가 싶다. 요즘, 사람을 꽃보다 더 아름답게 여기는 정원사의 손길이 문득 그리워진다. 축구를 보며 흘린 눈물 한 방울이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희망과 위안의 씨앗이 되길 정말로 희망해본다.

권지예 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