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맞으며]이순원/고향마당서 생각나는 것들

  • 입력 2002년 2월 9일 15시 52분


대관령의 새 길이 뚫렸다. 지금은 그 길을 달려온 고향 마당이다. 새 길은 지난 가을에 뚫렸다. 진작에 한번쯤 달려왔어야 할 길이었다. 그러나 새 길에 대한 말만 들었지, 이렇게 설이 되도록 한번도 그 길을 달려 고향에 와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보다는 매인 데 없는, 오직 글만 쓰고 사는 전업작가인데도 그랬다.

내가 처음이니 아내도 아이도 이 길이 처음이다. 그렇다고 지난 가을과 겨울이 다 가도록 온가족이 함께 어디를 둘러보았던 적도 없었다. 주말마다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메우고, 그래서 그 고속도로가 이 땅에선 가장 속도가 느린 저속도로로 바뀔 때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그 대열에 합류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명절은 삶의 여유 찾는때▼

아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온전하게 쉴 틈 없는 나날들이었다. 때로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또 때로는 그럴 만한 경제사정조차 여의치 않아서 저마다의 삶자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들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직장과 일을 가진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바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공부의 중압감 속에 크느라고 고생이다. 돌아가는 세상은 뉴스만으로도 늘 기가 막히고, 자신의 삶은 한치도 여유가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 어른 가릴 것 없는 현대인의 삶인지 모른다.

늘 이렇게 고향 마당에 와서야 드는 생각 중의 하나는 왜 좀 더 진작에, 그리고 자주 이곳을 찾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 저마다의 삶자리로 돌아가면 여전히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일상 속에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바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고생한다. 정말 이런 명절이 없다면 이런 여유조차 없는 삶들이다.

어린 날 이곳 대관령 아래의 작은 마을에서 살 때엔 전혀 짐작도 못한 세상이고 또 삶이다. 그때 우리는 다들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했다. 언제나 우리 눈앞을 우뚝 막아서는 산. 해가 지는 산. 초겨울부터 내린 눈이 봄이 되도록 남아 있는 산. 그런 저 산중을 뚫어 아흔아홉 굽이의 길 대신 새 길을 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명절을 맞아 모처럼 그 길을 달려와 찾은 고향, 이번엔 동네 어른들께도 세배를 드리고 올라갈 생각이다. 예전에는 한 마을의 우리를 다 내 자식같이 귀하게 여기셨고, 지금도 틈틈이 안부를 물으시는 어른들이다. 초하룻날엔 집안 세배를 드리고, 초이튿날엔 마을 사람 모두 촌장댁에 모여 마을 사람간의 합동 세배(도배·都拜)를 올린다. 예전에는 가끔 바쁘다는 이유로 그 도배에 참가하지 못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빠르게 변해 가는 세상 속에 때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옛 풍습을 지키는 모습도 고향의 넉넉함일 것이다.

서울서 내려오던 날 고향 친구들도 만났다. 절반은 대처에 나가 있고, 절반은 고향 인근에 살고 있는 옛 친구들도 이런 명절 때가 아니면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다. 고향을 떠나 대처에 나와 살며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거나 놓치고 산 것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은 저 대관령에 새로 뚫은 길에도 어김없이 적용될 얘기다. 아흔아홉 굽이의 길 대신 산중에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어 넓힌 새 길로 고향으로 가는 길이, 또 고향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30분 이상 단축되었다고 한다. 쉽게 계산하자면 30분쯤 시간을 번다는 얘기가 되겠는데, 어쩌면 그렇게 빨리 가는 30분이 때로는 우리가 너무 빠른 속도 속에 잃어버리거나 놓치기도 하는 시간일지 모른다.

▼소중한 것 잊고 산 느낌▼

이것도 고향 마당에 오니 비로소 드는 생각이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내몰리는 속도 속에 살고 있다. 때로는 천천히 가는 시간 속에 여유롭게 자신을 둘러볼 시간도 가져야 할 것이다. 어디 그것이 대관령뿐이겠는가. 이 땅의 모든 고향 마당이 주는 풍요로움과 여유가 이 명절 연휴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그 여유의 여운은 우리 모두 다시 삶자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길게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우리 고향의 이른 봄 소식 하나를 미리 전한다.

아직 찬바람 속에도 산수유나무 가지마다 좁쌀 만한 꽃망울들이 매달려 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새 봄에 피어날 그 꽃처럼 화사했으면 좋겠다. 부디, 부디….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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