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수산/한일 대학선발축구를 보고

  • 입력 1997년 4월 13일 19시 58분


더할 수 없이 화창하게 아침은 밝았다. 서울을 떠나며 공항으로 나오는 길에 만났던 여의도 윤중제의 벚꽃은 숨막히게 화사했는데 도쿄 니시가오카 경기장 주변의 벚꽃은 이미 지고 없었다. 13일 오후 1시30분, 양국 국가연주와 함께 시작된 대회는 경기장에 내 걸린 「21세기를 향한 킥오프」라는 현수막 그대로였다. 쓰러진 선수에게는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경기는 격렬했지만 선수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들겼다. 우애의 한마당은 그렇게 이어졌다. ▼시종 우애의 한마당 ▼ 후반 한국팀이 배번 11번의 선수로 교체하자 일본도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11번으로 교체하기까지 한… 그런 게임. 관중석에서는 『와타다! 요코야마!』하고 일본 선수의 이름을 연호(連呼)하는 소리와 함께 북을 울려댔다. 한국 골 뒤에 자리잡은 일본 응원단이었다. 두 나라의 성숙도를 말해 주듯이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까지 끼어 있던 일본 관중과 한국 교민들, 학생들까지 스탠드는 특이하게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늘 숙적이라는 말이 접두어처럼 붙어 다니던 한일전이 아닌가. 패스가 연결되지 않으면서 드리블에만 의존하는 일본팀을 압도한 전반은 우리 선수들의 힘과 투지가 돋보였다. 손발을 맞춘지 열흘 남짓, 그러나 우리의 선수들은 늠름했다. 전반 15분이 지났을 무렵 기자석의 한 일본기자는 『역시 차이가 느껴진다』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마지막 로스타임까지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따사로운 봄볕이 묻어나는 박수를 치는 사이 게임은 끝났다. 골 결정력에서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선수 개개인의 스피드 개인기 공간활용까지 그 어느 것도 한국 선수들은 일본팀에 뒤지지 않았다. 그것은 0대1의 스코어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웃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한국 관중들의 밝은 얼굴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구기종목 가운데서도 축구처럼 그 민족성이 드러나는 경기도 없다. 다른 어떤 구기와 달리 축구는 그것이 자라난 연못을 본능적으로 드러낸다.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바로 그것이 축구가 단순히 공을 차는 것을 넘어서는 사회학적 의미는 아닐까하고. 스탠드에 앉아 푸른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는 두 나라 선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도쿄로 향하는 특급열차가 햇빛 속으로 나섰을 때 제일 먼저 내 눈을 잡은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장대에 매달린 잉어였다. 「고이노보리」라고 일본인들이 말하는 그 잉어. 장대에 잉어모양을 그려서 커다랗게 달아 매 놓은 그 일본민속의 하나를 보면서 「아, 일본인가」싶었다. ▼고급문화도 교류를▼ 경기를 끝내고 그라운드를 나서는 선수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두 나라의 젊은 이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날은 언제일까. 축구만이 아니다. 지난 역사에 대한 공동인식의 터를 비롯하여 고급문화의 교류도 이어져야 한다. 또한 두 민족 정서의 뿌리가 되는 민속예술의 상호교류도 서로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일본은 무엇인가. 과거라는 이 씻어도 씻기지 않는 피멍을 언제까지 한국인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가. 두 나라의 젊은 지성이 해야할 몫도 거기에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소중한 내일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 저들이 몸을 부딪치며 서로를 확인했듯이 작지만 굳건한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서 먼 화해의 날을 위해 운동화 끈을 매는 오늘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다만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도쿄에서=한수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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