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에]새 것과 낡은 것

  • 입력 1997년 1월 2일 20시 02분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처럼 상투적인 말도 없다. 무엇이 새로운 것이며 무엇이 낡은 것인지조차 모르면서 우리는 이 새해 인사말을 하는 것이다. 정말 그것을 분별하여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정말 새해는 천지 창조 첫째날처럼 눈이 부실 것이다. ▼ 무엇을 버릴 것인가 ▼ 학자들은 오늘날의 새로운 증후군을 대개 다섯가지 요인으로 풀이한다. 첫째는 공산주의의 종언, 둘째는 인간주체의 두뇌산업, 셋째는 의술의 발달에 의한 고령화와 인구급증, 넷째는 경제의 글로벌화, 다섯째는 패권국가 없는 세계 등이다. 그러나 이같은 나열은 신문 스크랩처럼 「생성(生成)」이 아니라 「기성(旣成)」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몸으로 지진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 지진은 끝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역사란 항상 달리는 자동차의 백미러에 비치는 풍경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서는 지하에 묻어둔 지진계의 바늘처럼 아주 작은 진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기록할 줄 아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백미러가 아니라 수시로 운전대 앞으로 다가오는 도로 표지판을 미리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앞서 든 다섯가지 요인은 지구를 흔들어 놓은 지진에 불과한 것이다. 그 발생원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단층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서구의 몰락을 예감한 슈펭글러가 그러했듯이 문화 문명의 시대적 변화는 숫자나 논리로 분석할 수 있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차라리 운명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새것이라고 느끼는 것, 그리고 낡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컴퓨터의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음악적 분위기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분명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을 나타내주는 그 음악적 분위기는 베토벤적인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토벤은 그 생애나 음악이나 모두가 도전과 대결로 이루어져 있다. 운명이여 오너라! 귀머거리가 된 뒤에도 그는 장크리스토프의 모습 그대로 무릎을 꿇지 않고 자신의 영혼과 의지로 운명과 싸운다. 그래서 끝내 환희의 벌판에 이르는 것이다. 과거의 우리 영웅들은 모두가 베토벤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물론이고 정치는 혁명이었고 기업은 전쟁이었으며 삶은 투우장이었다. 결핍과 냉전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베토벤의 말갈기 같은 머리칼을 하고 질주해 왔다. 그것을 다른 말로 요약하자면 악룡(惡龍)을 죽여야만 아리따운 공주와 결혼할 수 있는 「세인트 조 콤플렉스」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르면 모든 상황이 모차르트의 음악과 같은 분위기로 바뀐다. 밝고 편하고 순탄하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마적」의 경우처럼 대결이 아니라 이질적인 모든 것들이 피리소리에 의해 하나가 되는 힘이다. 투쟁이 아니라 조화이며 도전이 아니라 공생(共生)이며 역리(逆理)가 아니라 순리(順理)로 움직이는 세계다. 한마디로 그것은 부정의 음악이 아니라 긍정의 음악인 것이다. 실제의 연주 통계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90년대에 오면 언제나 수위를 지켜오던 베토벤의 자리가 모차르트에 의해서 역전된다. 일본 NHK의 최근 10년동안의 정기 연주회만 보더라도 모차르트는 1백42회인데 비해서 베토벤은 1백10회에 지나지 않는다. 한세기동안 우리를 지배해오던 베토벤의 인기가 붕괴하고 그 대신 모차르트가 새롭게 떠오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반목의 칼날」 거둬야 ▼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던 시대는 갔다. 정치도 경제도 그리고 학문이나 예술까지도 투쟁논리나 대결정신만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개인이든 사회이든 악룡을 죽이는 투쟁의 칼보다는 조화로 온 세계를 감싸는 피리를 향해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송구영신이다. 李 御 寧 <이화여대 석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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