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현진]신제품을 못 파는 대한민국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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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산업부장
박현진 산업부장
2010년 설립된 발광다이오드(LED)램프 전문업체인 ‘아이스파이프’ 임직원 100여 명은 요즘 마음이 착잡하다. 꼬박 2년간 100억 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해 개발한 110W 고효율 LED램프들이 1년 가까이 창고에 쌓여 있어서다. 중소기업으로서는 어마어마한 연구개발(R&D)비를 투입해 던진 승부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을 잡혔다. 인증 기준이 60W까지만 되어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기준을 손봐 고효율 램프의 인증을 받으려면 수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인증을 받지 못하다 보니 사려는 곳이 많지 않다. 이런 사연을 전해준 한 임원의 목소리는 분노를 넘어 체념에 가까웠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유망 사업인 대용량 전기저장장치(ESS)는 건물의 비상전원공급장치 용도로 팔 수가 없다. 소방법에서 아직 허용하지 않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11월에 서울 영동대교 북단에서 코엑스에 이르는 5km 구간에서 첫 무인차 도로 주행 실험을 했다. 무인차를 연구실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현대차 관계자들은 수도 없이 관련 부처를 드나들어야 했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운전자가 없는 차량은 도로를 다닐 수 없다. 대구에 무인차의 실험 주행을 할 수 있는 규제 프리존을 만든다고 하지만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이미 미국 일본 등은 무인차의 시험 운행을 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은 앞서가는데 정부 간의 싸움에 지고 있다”고 했다.

기존 제조업에서 수익을 올리기가 점차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신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수소자동차 등 몇몇 제품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스파이프 사례처럼 이를 시장에 내다 팔 수 없거나 법과 제도 개선이 늦어 해외 경쟁업체에 뒤처지는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차다. ‘기업 발목 잡는 규제’나 ‘신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 제도’와 같은 지적은 수도 없었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현장은 훨씬 심각했다. 하나하나가 기업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결국은 가계 및 국가 경제와 직결된다.

한국이 새로운 기술과 사업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신규 법안을 통해 ‘허락’해 주는 법 제도의 틀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를 최소한의 금지 사항 외에 모든 활동을 허용하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행정규제기본법 개정안이 2014년 국회에 제출됐다. 이 법안은 1년 반째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지금과 같은 포지티브(positive) 방식의 체제로는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업 아이디어들을 절대 수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여의도에는 행정규제기본법만 쌓여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조정이 필요한 제조업체의 숨통을 틔워 주는 기업활력제고특별법(원샷법)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노동개혁법 등도 있다. 하나같이 경제회생을 위해 통과가 절실한 법안들이다.

기업인들이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 서명운동’에 잇달아 동참하는 것은 이제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서명은 기업인을 넘어 시장 상인과 은퇴자 등 일반 시민들로까지 확산돼 1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서명의 힘이었을까. 여야 원내지도부가 21일 오후 회동을 갖고 원샷법에 잠정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반가움보다 진작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더 진하다. 눈을 뜨면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는 광속(光速)의 세상에서 기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거북이걸음의 정치권과 정부에 묻고 싶다. 다른 것은 눈감더라도 어렵사리 개발한 신제품마저도 내다 팔 수 없는 나라를 만들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박현진 산업부장 witness@donga.com
#신제품#아이스파이프#중소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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