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회사 배지 어디 뒀더라?”… 사장님 호출때만 서랍 뒤적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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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기업문화, 사라진 배지

삼성그룹의 대표적인 ‘OB’ 멤버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박근희 삼성사회공헌위원회 부회장은 요즘 부하 직원들의 재킷을 유심히 살펴본다고 한다. 회사의 로고가 그려진 배지를 제대로 달고 다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박 부회장은 올해 초 삼성사회봉사단장으로 취임한 뒤로 임직원들에게 회사 배지를 달고 다닐 것을 당부해왔다.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기본적인 에티켓과 품위를 지키며 회사 생활을 하라는 의미에서다. 특히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쓰러진 뒤로 회사가 전반적으로 정신무장을 강조하면서 그의 ‘배지 감찰’은 한층 강화됐다. 이 때문에 평소 회사 배지를 달고 다니는 데 익숙지 않은 젊은 직원들은 박 부회장에게 보고할 일이 생길 때마다 서랍 속에 넣어뒀던 배지를 부랴부랴 꺼내 달거나 옆자리 직원에게 급히 빌리기도 한다.

사라진 회사 배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광화문이나 여의도 등 대기업 본사들이 모여 있는 동네를 걷다 보면 회사 배지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양복 옷깃에서 반짝이는 회사 배지를 보고 서로의 소속 회사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주요 기업마다 신입사원 입사식에선 대표이사 또는 신입사원의 부모들이 직접 배지를 달아주는 이벤트가 단골 메뉴였다.

여전히 대부분의 기업이 새로 입사하는 직원에게 회사 배지를 나눠주긴 한다. 삼성과 SK, 현대차, LG 등 주요 그룹사를 비롯해 기업이미지(CI)를 갖고 있는 중견 기업 대부분이 신입사원 또는 경력직에게 배지를 평균 2개씩 지급한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출근 시 착용을 의무화하는 회사가 거의 없다 보니 실제 이를 달고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는 편이다. 자발적으로 배지를 다는 회사원이 부쩍 줄면서 요즘은 오히려 배지를 달면 길거리에서 튀어 보이는 정도가 됐다.

동아일보가 최근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함께 직장인 회원 75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70.4%가 ‘평소 회사 배지를 착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응답자들은 배지를 달고 다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는 53.8%가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번거로워서’라고 답했다. 한 3년 차 직장인은 “매일 재킷을 갈아입는데 아침마다 배지를 뺐다 다시 끼는 것이 귀찮아서 자연스레 빼놓게 됐다”고 했다.

비즈니스 캐주얼의 등장을 이유로 꼽은 사람도 많았다. 응답자의 25.2%가 ‘출근 복장이 정장이 아니라서’라고 답했다. ‘나의 소속 회사가 노출되는 게 싫어서’(18.2%) 등이 뒤를 이었다. 한 직장인은 “얼마 전 퇴근길 지하철에서 만취해 몸을 못 가누는 직장인을 봤다. 너무 ‘진상’이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그가 고개를 드는 순간 얼굴보다도 왼쪽 가슴팍에 달린 회사 로고가 더 먼저 눈에 띄었다. 그걸 보면서 회사 배지를 함부로 달고 다니다간 괜히 회사 망신이나 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배지를 달고 다닌다는 사람들 중에선 그 이유로 ‘회사 규정상 의무라서’라고 답변한 사람이 71.7%로 가장 높게 나왔다. 인크루트 측은 “평소 배지를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개인의 의지와는 크게 관계없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설명했다.

‘회사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라고 응답한 사람은 16.7%에 그쳤고 ‘상사의 눈치가 보여서’ 달고 다닌다는 사람은 5.0%였다.

달라진 조직문화와 패션

이 같은 변화는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기업 조직문화가 바뀌고, 출근 패션이 변하면서 생긴 현상으로 보인다. 변화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감지됐다. 2000년 4월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에도 변화의 조짐이 기록돼 있다.

‘삼성 직원들은 지난 수십 년간 매일 아침 사내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삼성 사가(社歌)를 듣고 업무를 시작해야 했다. 그것도 정장 차림에 일어서서 단정한 자세로. 그러나 IMF 체제 이후 사내방송에서 삼성 사가가 울려 퍼지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만 나온다. 캐주얼 복장으로 자리에 앉아 사가를 듣는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다. (중략) LG전자와 LG정보통신은 최근 정장 차림을 폐지했다. 자연스럽게 그룹 배지 착용 관행도 사라졌다. 누가 삼성맨인지 LG맨인지 구별할 수 있는 표식이 없어진 셈.’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정년 보장이 어려워지자 직원들이 회사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충성하는 시대는 끝났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기업문화도 바뀐 것이다.

특히 어릴 적부터 경제적 풍요 속에서 민주화와 글로벌화를 겪으며 자란 신세대 직장인들이 대거 입사한 뒤로 자연스레 사규에서 회사 배지 착용 의무화 규정이 사라졌다.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획일화된 문화보다는 개성을 강조하는 세대이다 보니 자신의 소속 회사를 노출하고 조직의 일원임을 강조하는 배지를 착용하는 문화를 부담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에 더해 출근 복장의 변화도 회사 배지 문화가 사라지는 데 일조했다. 풀 정장 차림의 ‘넥타이 부대’가 사라지고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이 보편화되면서다.

제일모직이 운영하는 삼성패션연구소가 지난해 서울 강남구 삼성동과 시청 앞, 여의도 등 사무실이 모여 있는 주요 거점에서 출근하는 남성 2000여 명의 복장을 확인한 결과 58.6%가 캐주얼 복장이었다. 정장을 입은 직장인은 41.4%에 그쳤다. 1990년대 70%가 넘는 남성 직장인이 정장을 착용했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사내 보안시스템이 강화됨에 따라 사옥 출입에 필요한 사원증을 목걸이 형태로 걸고 다니는 직원이 늘면서 이 목걸이가 자연스레 배지를 대체했다는 분석도 있다.

A그룹 계열사 직원 박모 씨(31)는 “점심시간이면 회사 안팎에 온통 회사 로고가 그려진 사원증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사람들뿐”이라며 “굳이 회사 배지까지 달지 않아도 사원증 목걸이만으로도 회사에 대한 소속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해외 기업들은 어떨까.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이 별도의 회사 배지는 제작하지 않는다.

애플의 경우 입사하면 회사 로고와 각자의 얼굴 사진이 새겨져 있는 사원카드만 제공한다. 애플 신입사원 김모 씨(25)는 “사원증을 바지의 벨트고리에 매달거나 목걸이로 걸고 다닌다”고 했다.

구글도 별도의 회사 배지는 없다. 다만 신입사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회사 로고가 박힌 색동 모자를 나눠준다. 구글 신입사원들은 입사 이후 첫 금요일에 모든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이 모자를 쓴 채 “누글러!”라고 외치는 환영 절차를 밟는다. 누글러(Noogler)란 새로운 구글러라는 의미다.

이 밖에 세계 최대의 비즈니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링크트인 역시 신입사원들에게 배지 대신 실용적인 용품이 들어 있는 가방꾸러미를 선물로 준다. 꾸러미에는 링크트인 로고가 새겨진 물병과 노트북을 비롯해 회사 창업자인 리드 호프먼의 저서 ‘당신의 기업(The Startup of You)’이 들어 있다고 한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기업문화#회사배지#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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