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빠름과 편함, 그러나 비싼 청구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4일 2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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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대신 빨리 나오는 음식 주문하듯 매사 느리고 불편한 것 잘 참지 못해
빠르고 편한 IT 강국 이뤘지만 사이버 보안체계는 허점투성이
편함에도 빠름에도 공짜는 없어… 개인정보 유출사고 추가범죄 걱정
어느 나라가 이토록 카드 남발하나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한국은 신용카드 천국이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이라면 발급을 거절당할 신용으로도 어렵지 않게 카드를 손에 쥘 수 있다. 한국인은 신용 정도에 비해 신용카드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국민으로 꼽힌다. 카드를 빨리 발급해주는 속도에서도 한국은 으뜸권이다. 어디를 가나 카드 권하는 사회처럼 보인다. 세일 중인 백화점 매장에서 “이건 몇 % 할인입니까” 물으면 “30%인데, ○○카드 추가할인도 해드려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포인트 적립도 넘쳐난다. 레스토랑 주유소 같은 곳은 제휴카드 우대를 통해 단골 확보 경쟁을 벌인다. 거의 모든 소비에서 할인 혜택을 받기 위해 카드를 열 몇 개나 지갑에 꽂고 다니는 카드 마니아도 있다.

카드 결제로 아침에 인터넷쇼핑을 하면 저녁에 배달받아 바로 착용하고 외출할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인터넷과 모바일에만 익숙하면 더없이 빠르고 편한 나라이다. 웬만한 금융거래는 컴퓨터 앞에서, 아니 침대에서 뒹굴면서 모바일로도 할 수 있다. 맛있는 것보다 빨리 나오는 음식을 주문하는 식당 풍경이 낯설지 않듯이 매사 느리고 불편한 것을 잘 참지 못한다. 외국 어디를 가도 우리보다 느리고 불편하다. 빠르고 편한 정보기술(IT) 강국을 이루는 데 국민성이 한몫했다. 그러나 사이버 보안체계는 허점투성이다.

편함도 빠름도 공짜가 아니다. 지난달 밝혀진 3개 카드회사의 개인정보 1억여 건 유출사태는 빠르고 편함에 공짜가 없음을 거듭 말해준다. 디지털 프라이버시의 핵심이자 추가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는 개인정보 유출은 신종사건도 아니다. 2008년 1860만 명의 개인정보 웹서버 해킹, 1150만 명의 상담사이트 정보 유출, 2010년과 2011년 개인정보 판매상들의 중국 해커를 통한 3900만 명분 정보 유출, 2011년 중국 주소로 ‘알집’을 이용한 3500만 명분 해킹, 또 다른 1320만 명분 서버백업 해킹, 그리고 2012년 대리점을 사칭한 870만 명분의 영업시스템 해킹 등이 이어졌다. 해킹과 같은 기술집약적 사이버범죄는 피해규모를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사이버 공간은 가상의 세계가 아니다. 눈앞에, 그리고 손 안에 있는 실존 세계이다. 육·해·공군의 전쟁은 국가 간, 군인 간에 벌어지지만 사이버 전쟁은 지구촌 모든 개인 간에도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질 개연성이 있다. 나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일어난 어느 카드사의 카드를 쓰고 있다. 나에 관한 정보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알 길이 없다. 누군가의 2차, 3차 사이버범죄 대상이 되었거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나에게 새로운 보이스 피싱이 시도되고, 그런 것에 속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내가 어처구니없이 당할지도 모른다. 내 이름과 주변인 이름, 그리고 거래은행과 계좌번호, 또 다른 소소한 정보들까지 들이대면 반드시 격퇴한다는 보장이 없다. SMS 문자메시지로 피싱하는 스미싱에 걸려들어 첨부된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는 바람에 감쪽같이 돈이 빠져나갈 수도 있다.

이번에 사고가 난 롯데카드가 수집하는 개인정보 항목이 94개에 이른다고 한다. 가족정보, 인터넷 및 모바일 사용상의 비밀정보 등을 포함한 많은 정보가 범죄에 악용될 소지는 언제든지 있다. 사이버공간에 한번 기억된 정보는 잊혀질 권리도 누리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에 관해 잊기도 하고 망각을 통해 아픔도 치유하지만, 이 편리하고 빠른 사이버 공간에는 한두 사람이 아무리 지워도 없어지지 않는 정보들이 살아 돌아다닌다. 그것들이 특정인에 대한 인격 살인의 흉기도 된다.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카드 사용자도 정보 제공에 동의하지 않았느냐”고 했다가 호되게 당했다. 카드사가 제시하는 약관과 정보 요구에 동의해야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이용자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죗값을 대통령까지 나서서 치렀다. 무엇보다 카드사의 약관과 정보 과잉요구를 관리 감독해야 할 정책책임자가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드사도, 카드 사용자도, 카드 업무를 관리 감독하는 정부도 눈감아온 것이 있다. 바로 우리 모두가 그 속에 빠져 있어서 어느 쪽도 문제 제기를 하기 싫은 빠름과 편함의 관행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우리처럼 쉽게 카드를 신청하고 발급하고 사용할 수 있는지, 이번 사고를 계기로 해서라도 둘러봤으면 싶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우리보다 신중할 때는, 그들이 게으르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라 편익과 안전의 균형점을 더 고민하기 때문일 것이다. 빠르고 편함의 대가를 요구하는 비싼 청구서가 언제 또 날아들지 모르겠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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