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종혁]나는 의학박사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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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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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혁 국립암센터 암정책지원과장
박종혁 국립암센터 암정책지원과장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배우 송혜교가 시각장애인 오영 역을 열연하고 있다. 오영은 나와 같은 ‘터널비전’ 질환을 갖고 있다. 나는 정상인이 고속도로 터널 저 끝을 볼 때와 같은 시야로 살고 있다. 그나마 아직 중심 시야가 남아 있어 글을 한 자씩 읽을 수 있지만 드라마 속 영이는 읽지도 못하는 것 같다.

살아남은 5% 시력으로 공부해

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선천성 망막색소변성증을 앓았다. 어렸을 때부터 날이 어두워지면 사물을 식별하기가 어려워 놀다가도 집에 들어가야 했고, 밤에 화장실 가다가 실수도 많이 했다. 고맙게도 시력이 아직 남아 있어 어찌어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다행히 의사(연구직)가 될 수 있었다.

남들은 내가 일할 때 중증시각장애인인 걸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순간만은 나도 내 주변에서 일하는 비장애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 밖으로 나가면 달라진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나는 늘 ‘폼 나는 의학박사 생활’을 하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야만적인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처음 가는 강의실이나 세미나실을 혼자 힘으로 찾을 수 없다. 출강하고 있는 의과대학은 학생이 많아서 강의실이 웬만한 극장 같다. 출입문은 뒤에 있다. 항상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하고 누군가의 안내를 받는다. 거리가 멀거나 친절한 안내가 없는 경우에는 강의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음식점이나 극장에 가는 것도 어렵다. 웬만한 맛있는 레스토랑은 실내가 어두운 경우가 많다. 나는 맛있는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쉽게 찾을 수 있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집에 가게 된다.

지금까지도 내 정강이에는 항상 멍이 있다. 길거리 턱들과 장애물로 인해 무릎이 까이고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멍이 없어질 쯤에 다시 넘어졌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는 연구직이라 전문 분야에는 나름 소식이 밝지만 일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가십거리나 최근 유행, 사내(社內) 정치엔 매우 둔하다. 정보 접근성, 이동성 부족으로 직장에서의 생존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두렵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시각장애인 복지관은 1982∼1997년 45명의 피아노 조율사를 양성 배출했으나, 그중 3명만이 자영으로 피아노 조율 일을 하고 있으며 39명은 현재 안마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은 비시각장애인보다 청각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인데도 불구하고 비장애인과 똑같은 출발점에서 경쟁할 경우에는 그러한 장점들조차도 상쇄돼 경쟁에서 도태된다.

만일 내가 병을 좀더 심하게 앓아서 그나마 남아 있는 5%의 시력조차 쓰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초중고교는 맹학교를 다녀야 했을 것이고 의과 대학은커녕 일반 대학도 다니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오영처럼 장애인인 걸 인지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점점 많아졌다. 다른 장애인들의 애환이 남일 같지 않았다. 아니, 이제 내 일이 된 거다. 몸이 불편해 불이 난 집에서 탈출하지 못해 죽고, 중증장애인이 굶어죽는 일들이 일어나도 추호도 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이제는 나에게도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방에만 있는 장애인에게 기회를

아직도 우리나라 장애인은 어두운 방구석에 가구처럼 남겨져 있다.

그래서 알았다. 나보다 더 나은 재주를 가지고도 교육을 못 받고, 일도 못 하고, 방안에만 박혀 있는 수많은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국가가 기회를 주었더라면 나보다 훨씬 훌륭한 박사가 되었으리라는 것을.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홀로 고립된 그들만의 세상, ‘장애인의 나라’에 들렀다 온다. 지금은 하루에 몇 번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내가 시력을 잃게 되면 머무르게 될 그 나라에 말이다.

박종혁 국립암센터 암정책지원과장
#시각장애인#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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