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올가을 꼭 만나고 싶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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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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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류태형 지음/360쪽·1만4000원·명진출판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손끝을 떠나는 순간, ‘지휘자 정명훈’이 총체적 인간으로 살아난다. 그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해 세계 최고 권위의 도이체그라모폰(DG)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고 있다. 서울시향의 콘서트는 표를 구하기 힘든 공연이 됐다. 그는 음악전문지 선정 세계 1, 2위를 다투는 오케스트라인 로열 콘세르트허바우와 베를린필의 지휘대에도 선다. 한국인으로 지휘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기까지 그의 발자취가 책갈피마다 생생하다.

월간 ‘객석’의 편집장을 지낸 음악칼럼니스트인 저자는 흩어진 퍼즐을 하나씩 맞춰 가며 ‘인간 정명훈’이라는 온전한 그림을 그려냈다. 지금의 정명훈을 만든 사연들이 촘촘하게 그려진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거쳐 생애와 성과를 조명했고 인터뷰를 통해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한 남자, ‘아들 바보’로서의 내밀한 면면도 복각했다.

정명훈은 ‘내 인생의 스승’으로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1914∼2005)와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을 꼽는다. 동양에서 온 젊은 지휘자를 믿어주었던 두 거장과의 에피소드에는 온기가 가득하다. 줄리니가 음악감독을 맡았던 로스앤젤레스필에서 정명훈은 부지휘자로 일했다. 연주를 잘해야 한다는 긴장과 강박으로 도리어 역량에 못 미치는 지휘를 했던 그에게 줄리니는 “너는 지휘자다”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공연장을 찾은 메시앙은 연주가 끝난 뒤 정명훈의 악보를 살펴보고는 ‘최고의 해석-올리비에 메시앙’이라고 직접 적었다. 1990년 정명훈이 도이체그라모폰과 계약하고 첫 녹음으로 선택한 곡이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이었다. 이 밖에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정치적 이유로 빚어진 갈등의 전모, 라디오프랑스필과 아시아필, 서울시향을 일구며, 음악으로 통일에 기여하기 위해 발 벗고 뛰는 과정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카리스마 넘치는 정명훈에게도 애틋한 로맨스가 있었다. 명화 누나(첼리스트 정명화)의 결혼식 때 정명훈은 다섯 살 연상의 사돈처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두 사람은 가족 몰래 카리브 해로 밀월여행을 떠나는 등 2년 넘게 비밀 연애를 했다. 정명훈이 다이아몬드 반지로 청혼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겹사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버지는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아련한 흑백 사진에 담긴 정명훈의 옛 모습도 눈길을 끈다. 일곱 살 때 피아노 의자 위에 방석을 접어 깔고 앉아 서울시향과 협연했다. 1974년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등을 차지하고 귀국해 카퍼레이드를 하고, 메시앙과 함께 악보를 들여다본다. 어머니와 아내, 세 아들과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짓는 그는 행복해 보인다. 국내에서 ‘제대로 된’ 음악가의 전기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이 더욱 반갑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책의 향기#문학예술#정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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