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아, 아버지! 국물만 우려내고 버려진 멸치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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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6일 11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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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을 다 낸 며루치(멸치)는 버려야지요. 볼썽도 없고 맛도 없으니까요.”

연극 ‘아버지’에서 아버지 이순재는 참 와 닿는 시라며 마종기 시인의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를 읽고 또 읽는다.

아서 밀러 원작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식으로 각색한 연극 ‘아버지’. 노골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마종기의 시만큼 연극 또한 우리네 아버지, 우리네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짜인 연극 같지가 않다.

또 우리에게 친밀한 중견배우인 이순재(77)와 전무송(71)이 주인공 아버지를 연기해 더욱 친밀감 있게 한국의 아버지를 보여준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부터 볼썽없는 며루치를 닮게 된 것일까.

풍요로웠던 시절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잘 나가는 세일즈맨이었고, 아들에게 ‘당당하게 살라! 뭐든 할 수 있다’고 외치는, 든든한 산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샌가 아버지는 평생을 몸바쳐 일해 온 회사에서는 폐물 같은 존재가, 기대와 정성으로 키운 아들에게는 소통이 안 되는 답답한 아버지가 되어있다.

가장 회피하고 싶은 모습을 직면하듯 거북하다. 하지만 우리와 똑 닮은 모습에 위로를 얻는다. 2012년 한국의 ‘아버지’를 만났다.

▶노년 실업과 88만원 세대…노골적 사회풍자

연극 ‘아버지’는 한국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연일까. 원작 ‘세일즈맨의 죽음’의 시대적 배경인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은 한국의 현 시대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대공황기의 노년 실업, 청년 실업, 주택담보대출 등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본에 의해 사용되고 버려지는 개인과 그로 인해 파생된 가족의 갈등, 이에 스마트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 등 디테일한 상황 설정은 극에 현실감을 더한다.


연출을 맡은 전 문화부장관 김명곤 감독은 “인물과 배경 등에서 한국화를 위해 변형이 이루어졌다. 내 가족, 또는 이웃의 이야기로 공감하게 하려고 현실에 밀착된 취재를 하며 장면과 대사를 묘사했다”고 현실감을 강조한 사실을 알렸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또 남자로서 짊어진 아버지의 강인함이 IMF 이후 노년실업, 아들 세대의 청년실업과 마주한 뒤 꼿꼿한 자존심으로 변질된 풍경. 이 자존심이 아들과의 다툼으로 번지고, 인정하기 싫은 현실에서의 도피로 이어지는 풍경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미화도, 과장도 없는 한국 사회의 단면이 초라하다. 잘못됐다고 비난하는 질책보다도 뼈아프다. 그렇게 연극 ‘아버지’는 우리네 아버지를 고스란히 묘사하는 것만으로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내뱉고 있다.

▶이순재vs전무송, 두 거장의 연기대결

연극 ‘아버지’ 속 두 아버지 배우의 진검승부는 주목할 만하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대표 아버지상을 보여 준 이순재와 50여 년을 연극무대에서 활약해 온 전무송, 두 거목이 아버지 장재민 역에 더블캐스팅 돼 열연을 펼치고 있다.

두 사람의 노련한 연기는 오랜 경력에서 우러나는 연기력, 그 이상이다. 허구적 역할이 아닌, 가장 사실적인 아버지의 초상을 표현하기에 두 배우의 대사 한 마디, 행동 하나는 연기라기보다도 마치 아버지 모습의 연장선 같아 보인다. 이들의 눈물과 초라한 뒷모습은 실제 아버지로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배우들 역시 자신의 삶을 투영한 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친다.

어머니 역의 차유경은 지고지순한 아내이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어머니의 역할을, 아들 역의 이원재는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원망을 동시에 지닌 실패한 아들로서의 모습을, 딸 역의 정선아 역시 명랑한 성격이지만, 실패의 아픔을 겪고 있는 88만원 세대로서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낸다.

▶이 시대 아버지들에게 바친다

“너희 아버진 돈도 많이 벌지 못했고, 신문에 이름이 난 적도 없지만 훌륭한 가장이다. 평생토록 방방곡곡 다니면서 회사 물건을 팔아줬는데 이제는 나이 먹었다고 폐물 취급을 한단다. 너희 아버진 폭풍 속에서 항구를 찾고 있는 조각배 같은 분이셔.”

극중 부인의 발언은 아버지 위상을 높이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저 자존심만 남은 초라한 아버지의 뒷모습만 더욱 부각할 뿐.

아버지는 결국 자살을 택한다. 늘 음지에 씨앗을 심으며 피지 않을 꽃을 기다린 것처럼, 아버지는 피우지 못할 희망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국물만 우려내고 버려졌다.

우리가 생각해온 아버지의 위상은 온데간데없지만, 연극은 아버지는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씁쓸함만 남기는 끝 맛에는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예찬이 서려 있다.

어떠한 위로나 희망의 메시지로서가 아니라 그저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만으로.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인가. 연극 ‘아버지’는 4월 29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된다.

사진 제공ㅣ(주)아리인터웍스
동아닷컴 원수연 기자 i2over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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