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조선 왕들은 왜 몰래 蘭을 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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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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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국가의 회화/박정혜 윤진영 황정연 강민기 지음/372쪽·2만8000원·돌베개

1872년 이한철 조중묵 박기준 등 화사 10명이 그린 태조 어진(御眞). 영희전(永禧殿)의 어진을 범본으로 한 그림이다. 돌베개 제공
1872년 이한철 조중묵 박기준 등 화사 10명이 그린 태조 어진(御眞). 영희전(永禧殿)의 어진을 범본으로 한 그림이다. 돌베개 제공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에 약탈당했던 외규장각 도서가 지난달부터 네 차례에 걸쳐 한국에 돌아오고 있다. 외규장각 도서의 대부분은 조선왕실 의궤. 중요한 왕실 행사의 과정과 의례절차 등을 기록한 책이다. 의궤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은 여기에 각종 시각자료가 채색화로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외규장각 도서가 돌아오면서 연구자들뿐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의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의궤에 대한 일반의 이해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이 책은 다양한 시각자료와 꼼꼼하면서도 쉽게 풀어 쓴 해설로 일반인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의궤에 그려진 그림, 즉 의궤도는 17, 18세기를 거치면서 내용과 표현양식 색채 면에서 다양해졌다. 각종 의례에 사용되는 의물 제작의 샘플 그림이라 할 수 있는 견양도, 왕실의 주요 행사와 의례 때 배치되는 관원, 의물의 위치와 순서 등을 표시한 반차도 등이 의궤에 수록됐다.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의궤는 1600년 의인왕후의 국상과 관련된 의궤들이다.

저자들이 다룬 것은 의궤도뿐 아니다. 왕실에서 향유했거나 왕실이 주관해 제작된 모든 그림을 ‘궁중회화’라는 틀 안에서 총체적으로 살폈다.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은 궁중회화 가운데 특히 중요한 그림이었다. 존엄과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어진을 실은 가마 행렬이 궁 밖으로 나와 진전(어진을 모시는 전각)으로 이동하는 봉안 여정은 그 자체로서 백성들을 한데 모으는 사회적 기능을 했다. 그런 중요성 때문에 어진을 그릴 때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 실력자를 도화서 안팎에서 폭넓게 선발했다. 또 어진을 그릴 때는 ‘터럭 하나만 달라도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론에 근거해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와 사실적 표현을 추구했다. 역사의 결과를 알고 어진을 봐서 그런지 책에 실린 어진 가운데 태조의 어진에선 당당함이 엿보이고 고종, 순종의 어진에선 왠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진다.

국가의 행정에도 많은 그림이 쓰였다. 왕이 전국 구석구석 다닐 수 없으니까 왕에게 업무 보고를 할 때 시각 자료를 곁들인 것이다. 지방관이 업무를 보고할 때, 변방의 일을 아뢸 때, 산성이나 행궁을 조성할 때 해당 지역에 대한 지형도와 산수형세도 축성도 등을 그려 함께 보고한 것. 이 역시 궁중회화에 속하는 것으로 저자들은 설명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궁중회화는 제작 목적과 용도, 제작자와 향유층을 고려할 때 이 밖에 네 종류가 더 있다. 왕실 행사를 재현하고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궁중행사도, 교육과 감계(鑑戒)를 위해 그려진 감계화, 왕과 왕족이 취미로 직접 그리거나 감상했던 그림, 궁궐의 안팎을 장식했던 그림 등이다.

이 가운데 특히 귀한 자료는 왕이 직접 그린 그림들. 조선시대 왕들은 늘 신하들로부터 완물상지(玩物喪志·하찮은 것에 마음을 빼앗겨 큰 뜻을 잃음)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받는 바람에 내놓고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은밀하게 그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종 문종 성종 인종 선조 인조 숙종 영조 헌종 등은 직접 그림을 그렸다. 이 가운데 전해지는 그림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왕의 성향에 따라 그림에 대한 취향도 달랐다. 세종은 장식화와 의장용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세부 묘사가 격식과 이치에 맞는가를 꼼꼼히 따지는 편이었고, 난 그림과 대나무 그림을 즐겨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어릴 적부터 문예와 서화에 남다른 소양을 지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화원들의 장단점을 일일이 품평할 만큼 세심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헌종은 ‘평소에 서화를 사랑하여 고금 명가의 유필을 내부에 모아 두셨다’는 묘지문에서 볼 수 있듯 20대 초반의 나이에 방대한 분량의 서화를 직접 모아 수장했다. 현재 전하는 왕의 그림은 인종이 그렸다는 ‘묵죽도’의 판각본, 선조의 ‘묵란도’와 ‘묵죽도’, 정조의 ‘묵매도’를 비롯한 수묵화 여섯 점, 그리고 헌종의 ‘산수도’ 등이다.

감계화는 조선시대에 가장 빈번하게 그려져서 왕실에 올려졌던 그림이다. 농사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그림, 옛 성군과 선비의 고사를 그린 그림이 주류를 이뤘다. 사진처럼 행사 장면의 순간을 그대로 담는 궁중행사도는 기록과 기념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의식을 마친 뒤에는 그 내용과 형식을 보완해 기록하고, 행사도를 그려 관계자들로 하여금 나눠 갖도록 했다. 청계천 준설공사를 완료한 뒤 제작한 ‘준천계첩’, 세자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그린 ‘왕세자입학도첩’ 등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진행하고 있는 왕실 문화의 총체적 연구 가운데 첫 성과물을 엮은 책이다. 앞으로 ‘왕실문화총서’라는 이름 아래 ‘왕실의 미술’ ‘왕실의 일상’ ‘왕실의 행사’ 세 분야에 걸친 책이 잇따라 나올 예정이다. 왕실 문화는 조선시대 최고급 문화가 집약된 보고(寶庫)라는 점에서 앞으로 나올 다른 결과물도 기대된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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