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놓치기 쉬운 도시 속살… 위트 섞어 섬세하게 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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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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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이장희 지음 392쪽·1만5800원·지식노마드


서울을 소개하는 책은 많지만 서울을 ‘그린’ 책은 많지 않다. 서울 곳곳을 스케치해 엮은 이 책이 반가운 이유다.

도시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뉴욕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한 작가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면서도 놓치기 쉬운 서울의 아름다움을 섬세한 필화로 담아냈다.

사진과 글로 구성된 기존의 기행서들과 달리 오직 스케치만으로 서울의 속살을 보여준다.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를 그린 그림에는 입구 앞에 걸인 두 명을 그려놓고 “(바구니에) 동전이 들어가면 바로 주머니로 옮겨 넣고 있었다”고 설명을 달았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중구 만리동에 있는 손기정기념공원 내 손기정 두상 조형 아래에는 달리는 몸을 그려놓았다. “(마라토너인데) 두상만 달랑 놓인 게 어색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림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솜씨도 인상적이다. 마음대로 고치고 덜어내고 편집할 수 없는 실사(實寫)와 달리 스케치는 작가가 아름답게 느낀 순간과 공간,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배치하고 담아낼 수 있다.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들을 적어둔 낙서들 역시 그림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이다. 조선시대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이 살았던 종로구 수송동 수진궁터를 그린 그림에는 총각으로 죽은 제안대군을 몽달귀신으로 그려놓았다. 작가는 한양 호랑이도 줄행랑치게 만들었다는 공포의 ‘수진궁 몽달귀신’ 옛 집터에 들어선 카페에서, 밖으로 보이는 수진궁터와 몽달귀신을 스케치한 뒤 이렇게 썼다. “귀신보다 무서운 돈의 위력, 별다방.”

작가는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서울을 더 잘 알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림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스케치 노트와 대상물을 셀 수 없이 번갈아 보는 것은 그 외형을 알게 되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셀 수 없는’ 노력이 오롯이 담긴 그림들은 놀랄 만큼 세밀하다. 경복궁 근정전을 그린 그림에는 전체 건물의 모습은 물론이고 기단 난간에 세워진 사방신과 십이지신, 서수들 한 마리 한 마리를 따로 그렸다. 작가의 그림을 접하기 전 근정전 하월대 난간 한쪽에 해태 부부와 함께 작은 새끼 한 마리가 조각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 소개도 볼거리다. 1997년 3인조 소매치기단과 맞서다 숨진 액세서리 행상 이근석 씨의 추모비, 팍팍한 도심 풍경을 배경으로 200여 종의 동식물을 만끽할 수 있는 유네스코빌딩 옥상 생태공원,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종로구 연건동 옛 대한의원 건물 뒤편 실험동물공양탑 등이다. 중구 명동 한복판에 선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지석과 윤선도 집터 표지석, 청계천 노변 건물 뒤의 조선시대 사당 성제묘는 일반인들의 눈을 피하듯 절묘하게 숨어 있다. “우리나라 문화재 은닉보존 기술은 단연 수준급”이라며 작가도 놀랄 정도다. 스케치를 위해 한자리에 오래 머물며 대상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펴야 했던 작가이기에 찾아낼 수 있었던 보물들이다.

책에 나온 그림들은 작가가 5년에 걸쳐 틈틈이 그리고 모아온 것들이다. 처음에는 단지 취미로 그리기 시작했지만, 서울의 아름다움을 하나둘 발견해가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혹은 더 알고 싶어서 한 번 방문한 장소를 두 번 세 번 다시 찾으며 공부를 시작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작업하는 동안 수많은 풍경이 사라지고 바뀌었다. “서울은 유기체”라는 작가는 식상한 기행서, 새로울 것 없는 사진과 건조한 역사 설명에 지친 독자라면 유기체 이곳 저곳을 섬세하게 살려 놓은 그의 ‘스케치북’ 속으로 빠져볼 만하다.

작가는 ‘보그걸’을 포함해 여러 매체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뉴욕’ ‘아메리카, 천 개의 자유를 만나다’ 등의 책을 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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