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순수박물관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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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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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박물관 1, 2/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440쪽, 424쪽·각 권 1만3000원·민음사
독한 사랑, 그녀의 박물관을 만들다

오르한 파묵. 사진 제공 민음사
오르한 파묵. 사진 제공 민음사
‘운명적 사랑’에 대한 견해에 따라 이 책은 다르게 읽힐 것 같다. 약혼녀가 있는 상태에서 우연히 마주친 먼 친척뻘 여동생을 사랑하게 되는 스토리는 여느 로맨스에서도 그리 드물지 않다. 엇갈린 만남과 결국 이뤄지지 못하는 숙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생에 걸친 열정적인 연모와 집착으로 그 여인을 기리는 박물관을 만든다는 이 소설의 발상은 기상천외하다. 거기에는 그녀가 어린시절 탔던 자전거, 흰 양말, 속옷, 귀걸이, 심지어 그들이 데이트 하던 당시 식당 테이블에 놓였던 소금, 후추통도 전시한다니! 2006년 오르한 파묵이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이 장편은 1970년대 터키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연애소설이다.

주인공이자 소설의 화자인 케말은 이스탄불의 상류층 사회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 집안의 둘째 아들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악의 없고 순수하지만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전형적인 ‘도련님 스타일’. 약혼녀인 시벨 역시 프랑스에서 유학한 명문가 출신의 교양 있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이 커플의 운명은 퓌순이 나타나며 완전히 달라진다.

케말은 시벨의 선물을 사러 들어간 명품 숍에서 먼 친척뻘인 여종업원 퓌순과 우연히 마주친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과 매혹에 마음을 빼앗기고, 약혼을 앞두고 양다리를 걸친다. 앞날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시벨과 결혼한 뒤에도 퓌순과의 관계를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약혼식 날 찾아온 퓌순을 보고도 죄책감이나 번뇌보다 반갑고 기쁜 마음이 더 클 만큼 철이 없는 남자다. 퓌순은 그의 이중적인 태도와 우유부단함에 상처를 받고 그날 이후 자취를 감춘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퓌순이 갑자기 사라지고 난 뒤에 케말은 그녀의 부재가 주는 처절한 고통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이때부터 케말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부와 명예, 목숨까지 포기하는 낭만주의적 주인공들처럼 용단을 내린다. 주변의 지탄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시벨과 파혼한 그는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된 퓌순을 찾아낸다. 그리고 치졸하고 끈질기게 그 부부 곁을 맴돈다.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작가는 유머러스하게 묘사한다. 물론 한 번 어긋난 이들의 사랑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퓌순의 부재 당시 덮쳐온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아는 카멜은 그때부터 만일을 대비해 퓌순과 관련된 모든 물건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허무맹랑해 보일 만큼 지고지순한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 외에도 당대 이스탄불 상류층 사회의 면모, 보수적인 성 문화와 가부장적인 제도에서 갈등하는 젊은 세대들의 고민 등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이 순수하고 맹목적인 사랑에 설득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올 8월 말 이스탄불에 실제로 파묵의 소설을 바탕으로 당시 터키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을 보여주는 ‘순수박물관’이 개관할 예정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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