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최세현]비워서 넉넉해진 지리산 가을

  • 입력 2004년 10월 25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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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의 지리산 자락을 보노라면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보라색 꽃을 지천으로 펼친 쑥부쟁이와 꽃향유, 그리고 흰색의 정수를 보여주는 산구절초와 같은 화려한 꽃 말고도 여뀌, 방동사니, 바랭이, 수크령, 고마리, 쇠무릎, 쥐꼬리풀 같이 흔하디흔한 들풀들도 악착같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씨앗 만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 모습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이 절로 느껴집니다. 역광의 가을 햇살에 눈부신 산등성이의 억새꽃은 또 어떻고요. 게다가 저물녘 웅석봉 쪽 하늘을 선홍의 핏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은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절정 그것입니다.

아름답기는 빈 들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초여름 그 초록으로 영혼까지 헹궈주던 들판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안히 쉬고 있습니다. 가을걷이도 거의 마무리되고 알곡은 햇빛에 몸을 맡긴 채 마지막 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지친 날들을 견디어낸 저 들녘은 소중한 것들 다 나누어준 것 말고는 온전히 그대로입니다. 묵묵히 제 할 일 끝낸 이의 뒷모습처럼 그렇게 빈 들녘은 평화로움으로 물들어갑니다. 그렇게 빈 들녘은 편안한 휴식으로 다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일 동틀 무렵 닭들에게 줄 풀을 베면서 하루를 시작하는데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풀을 베기 위해 멀리까지 다닙니다. 요즈음은 산 아래 경호강 근처까지 내려갑니다. 그 강가에서 운이 좋으면 새벽 강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가끔씩 만납니다. 그럴 때면 마음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기 딱 좋습니다. 하지만 늘 후회와 아쉬움으로 가득한 걸 보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흐르는 강물의 속삭임을 듣다가 때론 거세게 부딪치면서 그렇게 긴 세월 자리 지키고 있는 강가의 크고 작은 숱한 돌들. 그 돌들의 웅크림에는 엄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날, 짧고 빠른 것들의 세상에서 새벽 강의 풍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언제나 단명으로 끝나는 이 가을의 숲과 들녘, 그리고 강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나눔과 비움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힘겹게 맺은 열매들 다 나눠주고 마지막 남은 이파리들도 이제 하나둘 땅으로 돌려보내는 나무와 풀들. 그렇게 나누고 비울 수 있으니 제 아무리 겨울이 매서워도 다시 꽃을 피워낼 수 있나 봅니다. 사실 나무들은 겨울을 넘기기 위한 겨울눈을 봄부터 준비합니다. 벌써 오동나무는 꽃눈을 만들어 겨울을 넘길 채비를 마쳤습니다.

가진 것 죄다 내려놓고 떠날 채비 하는 저 숲과 들녘, 그리고 부딪치고 깨지면서 묵묵히 제 길로 흘러가는 가을 강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모든 것 훌훌 털고 저 밑바닥까지 비워내는 일이 영영 불가능하진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비움과 나눔으로 넉넉해지는 이 가을이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이즈음의 지리산 자락입니다.

이 가을은 떠나갈 것이고 금세 바람의 계절이 찾아오겠죠. 온 산을 휘감을 매서운 바람 역시 나를 키우는 훌륭한 거름이었습니다. 언제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그 골바람에 온 몸을 맡기면 온전히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이렇듯 안솔기를 휘감는 바람 또한 소중한 우리의 식구임이 분명합니다.

이제 눈부신 가을을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면 매서운 바람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비움으로 한결 넉넉해진 숲과 함께….

최세현 농부·숲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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