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백일선/‘한국판 쉰들러’에 건국훈장 당연

  • 입력 2003년 8월 11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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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선
필자는 독립유공자의 미망인으로서 6일자 동아일보 A25면 ‘일본인 건국훈장 수훈자 탄생하나’라는 제하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변호사에 대한 기사를 읽고 안타까운 마음에 펜을 든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독립유공자를 추서함에 있어서 일본인을 배제해왔다. 그러나 일본인 중에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음지에서 고생한 분들이 왜 없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국가보훈처 산하 공훈심사위원회에서 3년간 9차례에 걸친 토론 끝에 만장일치로 후세 변호사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키로 결정한 것은 늦으나마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외교통상부에서 ‘변호사로서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이런 결정에 제동을 걸었다는 소식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후세 변호사는 3·1운동의 전신인 2·8독립선언사건(1919년), 일본 천황 암살 혐의로 구속된 독립운동가 박열 사건(1923년), 동양척식회사의 농지수탈 고소사건(1924년) 등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변론을 도맡으며 목숨을 걸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한 인물이다.

192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를 찾아보라. 후세 변호사가 서슬 퍼런 조선총독부의 감시 속에서 “일본 위정자들에게 분노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또 1926년 9월 중순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조선유학생 주최 조선총독 비판연설회에서 특별연사로 열변을 토하다 “변호사란 지위를 악용하여 비합법적 사회운동에 참여, 선동했다”는 구실로 일제에 의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징계재판에 회부되는 등 2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런 활동으로 일본경찰의 미움을 받아 1944년 2월에는 교토대학생이던 그의 셋째 아들이 태평양전쟁의 참전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 옥사하는 참극까지 겪었다. 결국 3차례나 변호사 자격이 박탈돼 조선유학생의 하숙으로 연명해야 했던 그의 삶을 그저 변호사란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 감동하면서 정작 민족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베풀어진 인간애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9월 13일은 마침 후세 변호사가 타계한 지 50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 묘비 앞에 늦으나마 보은의 마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백일선 대한선열부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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