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명구회와 한국인

  • 입력 2002년 2월 20일 10시 19분


명구회(名球會, Golden Player Club)는 쇼와(昭和) 이후에 출생하였으며 20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나 2000안타 이상을 기록한 현역 및 은퇴 선수를 대상으로 하는 모임이다. 가입 자체는 본인의 의사에 달려 있으며(80~90년대 최고타자였던 오치아이는 스스로 가입을 거부했다) 형식적인 모임이 아닌 일본프로야구의 저변확대를 위한다는 분명한 모토를 가지고 활동하는 모임이다. 현재 총 38명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으며 나가시마, 카네다, 그리고 오오가 모임 내에서 감투를 쓰고 있다.

명구회에 가입된 선수의 면면을 보면 - 당연히 그렇겠지만 - 매우 화려하다. 투수에는 이전에도 소개한 이나오, 카네다, 스즈키, 무라타, 야마다 뿐 아니라 히가시오, 호리우치, 무라야마 등, 타자에는 오오, 나가시마, 노무라, 후쿠모토, 키누가사 등 각종 대기록의 소유자와 그 동안 무수한 감동을 안겨주었던 대선수들이 포진해 있으며, 아키야마나 코마다 같은 근래의 선수들도 까다로운 가입조건을 통과하여 명구회의 양복을 입고 있다.

한국프로야구도 지난 1991년 일구회라는 모임이 탄생했으나 전, 현직 야구감독이 주축을 이룬다는 점과 결정적으로 일본의 명구회같이 실질적인 외부 활동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언젠가 우리나라도 이런 모임이 생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국의 야구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사회환원'한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이 명구회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 몇 있다.

카네다 마사이치(金田正一, 김경홍)

1933년생, 좌투좌타, 통산 944경기 출장, 400승 298패, 방어율 2.34, 4490탈삼진, 다승1위 3회, 방어율1위 3회, 탈삼진1위 10회, 베스트나인 3회, 사와무라 상 3회.

20세기의 최고에이스(2)편에서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는 "金田 天皇(카네다 천황)". 그의 한국명은 김경홍(金慶弘)이다. 아이치현에서 보낸 소년 시절, 전선에 앉아있는 제비를 돌팔매질로 떨어뜨리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185cm에 달하는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와 커브로 4490명의 타자를 덕아웃으로 되돌려 보냈다. 21차례에 이르는 0:1 완봉패가 없었다면 그의 통산 승수는 더 많았을 것이다. 이번엔 그의 다른 면을 살펴보자.

1933년생, 좌투좌타, 통산 1053경기 출장, 타율 .198, 406안타, 38홈런, 177타점, 160득점, 7도루, 99사사구, 367삼진.

비록 통산 1할 대의 타율에 머무르고 있지만 통산 406안타라는 것과 99사사구 중 고의사구가 8개나 된다는 것은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투수로 944경기에 출장했는데 타자로 1053경기를 출장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는 홈런에 대한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가 1950년에 기록한 1호 홈런은 17세의 선수가 기록한 것으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연소 홈런 기록인 것이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한국이름과 한국계임을 밝힌 그는 롯데 감독으로서 팀을 일본시리즈 정상에 올려놓기도 했으며, 해설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경홍의 동생 김말홍(카네다 토메히로) 역시 뛰어난 투수로 통산 128승을 기록하였으며 1974년엔 MVP에 올랐다. (정정합니다. 지난번 카네다의 홈런수가 36개라고 밝혔으나, 36개가 아닌 38개가 정확한 숫자입니다)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 장 훈)

1940년생, 좌투좌타, 통산 2752경기 출장, 타율 .319, 3085안타, 504홈런, 1676타점, 1523득점, 319도루, 1274사사구, 815삼진, 수위타자 7회, 출루율1위 9회, 신인왕, MVP 1회, 베스트나인 16회.

두말 할 필요 없는 일본프로야구 역사를 대표하는 타자인 장 훈(張勳). 명구회 가입조건이 되는 2000안타를 이미 한창때인 1972년에 작성했으며 통산 3085안타의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안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단타 위주의 타자는 아니었다. 13년 연속 20홈런 이상을 통해 통산 504홈런을 기록하였으며 도루도 319개나 기록했다. (일본프로야구 300-300은 장 훈 이외에 아키야마 코지가 유일하다) 통산 228개의 고의사구는 역대 2위의 기록이며 그가 요미우리 이적 이전에 기록한 414홈런은 니혼햄의 통산 최다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815삼진은 그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노무라(1478삼진)나 오오(1319삼진)에 비해 월등히 적은 숫자이다. 그러나 좌익수였던 그는 수비의 미숙함으로 골든글러브와는 인연이 멀었다. (골든글러브는 1972년부터 수여되었다) 하지만 퍼시픽리그에서 14회, 센트럴리그에서 2회 베스트나인에 선정된 바 있으며 올스타전 MVP에도 3차례 뽑혔다. 롯데에서 3000안타를 기록한 뒤 선수 생활을 마감한 그는 TBS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데 세간에 왜 장 훈 같은 대선수 출신이 감독이 되지 못하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장 훈은 스스로 몇 차례 감독직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생시절 및 프로시절 국내에 방한 경기를 가진 적이 있으며, 1967년에는 서울 명예 시민상을 받기도 했다.

아리토 미치요(有藤道世, 김유세)

1946년생, 우투우타, 통산 2063경기 출장, 타율 .282, 2057안타, 348홈런, 1061타점, 1171득점, 282도루, 691사사구, 1204삼진, 수위타자 1회, 신인왕, 베스트나인 10회, 골든글러브 4회.

1964년 코시엔 당시 얼굴에 데드볼을 맞아 이가 3개 부러지며 졸도했던 김유세는 후에 킨키 대학에 진학, 주장까지 맡으며 뛰어난 타격실력을 발휘했다. 유망주가 득실거리던 1969년 드래프트에서 롯데에 1순위로 입단, 그 해 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1986년 은퇴 후 다시 롯데의 감독을 맡는 등 그야말로 진정한 "미스터 롯데"였으며, 특출 난 스타가 없던 롯데에 몸담았던 점이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던 김유세를 더욱 빛나게 했다. 은퇴하던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100경기 이상 출장, 두자리 수 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꾸준했으며 입단 이후 8년 연속 20홈런 이상은 퍼시픽리그 기록(이것으로 그는 연맹의 특별표창을 받았다). 300홈런-200도루는 300-300을 기록한 장 훈과 아키야마를 제외하고 김유세와 키누가사 만이 기록했다. 1980년 6월에는 한달 사이 2개의 만루홈런을 쳐내기도 했으며 통산 348홈런은 코치현 출신 및 롯데 선수 중 통산 최다 기록이다. 역대 최고 3루수 중 한명인 그는 1976년 올스타전 1차전 MVP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은퇴 후 3년간 감독을 맡은 이후에는 TBS등에서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1975년 10월 국내 실업선발과의 대결을 위해 재일동포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적이 있다.

아라이 히로마사(新井宏昌, 박종률)

1952년생, 우투좌타, 통산 2076경기 출장, 타율 .291, 2038안타, 88홈런, 680타점, 933득점, 165도루, 544사사구, 422삼진, 수위타자 1회, 베스트나인 4회, 골든글러브 1회.

호세이 대학을 졸업한 박종률(朴鐘律)은 1975년 드래프트 1위로 난카이에 입단하여 그 해 50경기밖에 뛰지 않았지만 3할을 기록했으며 이듬해부터 교타자로 확실하게 명성을 날렸다. (두자리 수 홈런을 기록한 해가 1986, 1987년 두 해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단타자였다) 1986년 부터는 킨테츠 유니폼을 입고 선수생활을 했으며 총 18년의 선수 생활 동안 총 2038안타를 기록. 날카로운 눈매로 짧게 끊어치는 타격이 인상적이었던 그는 수위타자에도 한차례 오른바 있으며 통산 300희생타는 퍼시픽리그 기록이다. 오릭스 시절 이치로를 직접 지도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팀의 2군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80년대 초반 한국 프로야구의 재일동포 수입 리스트에 오른 적이 있으며 실제로 삼성 라이온즈가 입질을 했으나 결국 박종률이 아닌 투수 김일융이 선택된 바 있다. 제1회 한일 수퍼게임에도 출장했다.

(김경홍은 1973년부터 1978년까지 롯데 감독을 맡았으며, 1980년에는 장 훈이 롯데 유니폼을 입고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미스터 롯데" 김유세는 은퇴 직후 1987년부터 1989년까지 감독을 맡았으며, 김유세에 이어 1990년 부터 다시 김경홍이 감독으로 부임했다. 한국계 대스타들과 롯데와의 인연. 롯데의 구단주는 시게미츠 타케오(重光武雄), 즉 신격호이다)

이상 네 명의 한국계 선수를 소개했다. 사실 일본프로야구계, 아니 꼭 야구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누구누구는 재일이다"라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많이 나돌고 있는데, 명구회에 가입된 4명은 아직 귀화조차 하지 않았거나, 본인이 직접 한국계임을 밝혔거나 또는 재일동포 팀의 일원으로 방한한 적이 있는 등 아주 '명백한' 한국계인 경우이다. 한편 부산에서 태어난 후지모토 히데오(藤本英雄, 이팔용)는 200승 투수지만 쇼와 이전인 1918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명구회 가입 조건에 해당되지 않으며, 카네다 마사이치의 동생인 카네다 토메히로(金田留廣, 김말홍)와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이기도 했던 니우라 히사오(新浦壽夫, 김일융)는 통산 세자리 승수를 기록하였으나 200승에는 미달했다.

현역으로는 일본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인 카네모토 토모아키(金本知憲, 김지헌), 2000년 수위타자이자 신인왕을 수상하기도 했던 킨죠 타츠히코(金城龍彦, 김용언), 요코하마에 새 둥지를 튼 나카무라 타케시(中村武志, 강무지), 그리고 선동열의 일본 진출 당시 오릭스가 선동열 영입을 위해 해태에 보상카드로 제시한 바 있으며, 최근 구대성으로 인해 다시 한번 우리에게 유명해진 오릭스의 에이스 카네다 마사히코(金田政彦, 김정언) 등이 있다. 항간에는 300홈런의 이케야마 타카히로(池山隆寬)와 한신 감독인 호시노 센이치(星野仙一), 그리고 아예 조총련계라는 설득력(?) 있는 설이 있는 키요하라 카즈히로(淸原和博) 역시 한국계로 알려져 있으나 모두 본인이 직접 밝히기 전에는 한낮 루머에 불과할 따름이다. 실례로 지난 98년 한국의 모 스포츠지가 나카타의 한국계 설을 보도했다가 사과문을 게재했던 적이 있는데 나카타 한국계 설은 재일동포 사회에서 떠돌던 루머였을 뿐이었다. 본인이 '재일'의 여부를 굳이 밝히려 하지 않는데 주위에서 그 진위를 가리려 노력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가 진짜 한국계이든 아니든 말이다. 설사 제3자들의 노력으로 어떤 선수가 한국계임이 밝혀진다 해서 발생하는 실질적인 이득은 아무 것도 없다. 다수가 갖게 되는 한 핏줄에 대한 자부심? 그것은 한국계임이 드러나길 원치 않았던 그 선수가 후에 맞이할 상황들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차라리 진정한 동포애를 발휘하고 싶다면 출생의 근원을 덮어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굳이 일본 이름을 쓰고 있는 선수에게 한국계다 아니다 할 필요가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이미 한국 프로야구가 대형스타들을 일본에 수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1831안타, 209홈런의 주인공인 白仁天에서 시작한다) 애매한 성과 이름, 그리고 국적 문제를 따질 필요도 없다. 비록 이종범이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 끝에 귀국하여 아쉬움을 남겼지만 메이저리그 출신 강타자들도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은 일본 프로야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다지 낙담할 것은 아니다. 투수 쪽에서는 한국 프로야구에 복귀한 정민철이 실패작으로 꼽히지만 다분히 야구실력 외적인 부분이 가미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국인 투수가 3명이나 한 팀에, 그것도 스타 수집증에 걸린 요미우리에 있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선동열과 이상훈이 주니치에 있었다는 것은 첫해의 참담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많은 기회를 얻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것이었다. 정민태와 구대성은 현재 진행형으로 2년째인 올해 더욱 큰 기대를 갖게 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한국 선수들이 일본 야구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며 현해탄을 건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록 야구는 어디 가나 야구일 뿐이고 이제까지 일본행을 선택했던 선수들은 충분히 통용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선수 한명한명을 초정밀전자부품처럼 취급하는 일본식 야구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익혀왔던 한국식 야구와 다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가 사전에 충분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적은 그를 알고 있지만, 그는 적을 모른다? 그렇다면 패배는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연봉에 있어 1급 외국인 선수 대접을 받는 한국 프로야구 출신 선수들은 단기간 내에 몸값에 걸맞은 활약을 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일본에서 현미경에 의해 해부되는 그들은 얼마나 빨리 적에게 노출된 약점을 극복하느냐가 일본에서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 짓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계속적인 약점 노출로 인해 자신의 장기가 먹혀 들지 않게 되면 자신감 상실의 원인이 되며, 그것이 반복되면 결국 '스카우트 실패작'으로 낙인 찍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몇 차례 부상경력이 아쉽긴 하지만 일찌감치 일본식 야구를 익힐 수 있었던 조성민의 경우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보다 나은 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동등한 기회만 부여된다면 90년대 후반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활약으로 리그에 '태풍'을 몰고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KANEDA(金田)가 김씨, ARAI(新井)가 박씨임을 애써 따질 필요가 없다. SUN, CHO, JUNG, LEE, 혹은 제2의 SAMSON으로 한국인의 힘을 보여주면 된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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