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나희덕/폭력에 노출된 아이들

  • 입력 2001년 10월 30일 18시 41분


아이가 텔레비전 화면의 글자를 한두 자씩 읽기 시작할 때, 조금 더 자라서는 컴퓨터를 제법 다룰 줄 알게 될 때, 부모들은 그 모습을 성장의 한 순간으로 여기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그 흐뭇함은 곧 후회와 두려움으로 바뀐다. 하루종일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이와 끊임없이 실랑이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간신히 아이를 그 앞에서 떼어내 산책을 데리고 나가거나 다른 볼거리를 찾아 나서도 아이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이미 어떤 자극도 그 두 기계가 주는 짜릿한 즐거움을 대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0년 넘게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지내온 나 역시 자식에게는 무방비로 리모컨을 맡겨두고 말았으니 정말 부모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컴퓨터-TV속 폭력 무방비▼

그런데 환경잡지 ‘녹색평론’ 지난 호에 실려 있는 조지프 칠턴 피어스와의 대담을 읽으면서 이 문제에 관해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졌다.

피어스는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지성이 어떻게 발달하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 온 학자다.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은 결코 폭력적으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는 상상력을 비롯해 아이들의 정상적인 두뇌 발달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으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든다.

흔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컴퓨터 게임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는 텔레비전이라는 기술 자체가 인간의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가 방출하는 빛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우리의 뇌는 스스로를 닫아버리게 되고, 그런 최면상태에 맞서 텔레비전이나 게임산업은 일종의 ‘놀래주기 효과’를 위해 잦은 폭력장면을 내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감각과 정서는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되고,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공격성은 더 강하게 길들여져 웬만한 잔인함에는 놀라지도 않게 된다.

기계를 통한 유사 폭력의 경험은 폭력이 얼마나 부당하고 무서운 것인가에 대한 실감을 무화시키고 심지어 미화시키기까지 한다.

텔레비전을 가리켜 누군가 ‘눈으로 씹는 추잉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눈으로 만나는 폭력과 그로 인한 다른 존재의 고통을 그저 껌처럼 무심하게 씹고 있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실제의 폭력 체험보다 무서운 것일 수 있다. 스스로 그 폭력의 주체가 되어 보고 싶다는 모방심리를 발휘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싶다.

며칠 전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폭파하겠다고 협박전화를 해 군경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알고 보니 초등학생의 장난전화였다고 한다. 이런 장난을 일삼는 심리적 배경에는 텔레비전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학교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고등학생이 술을 먹고 교실 유리창을 무더기로 깬 사례나 평소 자기를 괴롭히던 친구를 갑자기 칼로 찔러 죽인 사건 등은 최근 우리 사회의 폭력 수위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실감케 한다. 두 학생 모두 영화 ‘친구’를 보고 흉내를 낸 것이라고 하는데, 같은 영화를 40번 넘게 반복해서 보면서 친구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다는 아이의 진술은 그렇게 방치해 둔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두렵고 부끄럽게 만든다.

▼'폭력 신드롬' 이대로 놔둘건가▼

그리고 이 기회에 우리 사회와 문화 전반을 움직이는 힘과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 조직폭력배를 다룬 영화나 소설들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일종의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에 대해 법적인 규제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고 폭력물에 대한 올바른 수용태도를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기계가 인간의 심성마저도 지배하는 문명적 조건과 폭력과 거짓이 성행하는 사회 구조가 돌이켜지지 않는 한, 이 부끄러운 사회적 산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성세대가 오늘도 텔레비전과 현실을 통해 두루 보여주고 있는 크고 작은 폭력들이야말로 그 엇나간 스승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계속 방치해 두는 것은 그 폭력을 적극적으로 학습시키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나희덕(조선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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