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與의 ‘국정 시계’는 몇시인가

  • 입력 2001년 9월 11일 18시 25분


내가 자주 들르는 카페의 종업원이 “요즘 나라가 엉망이죠?”라고 슬며시 말을 건넨다. 내 직업을 아는 그가 군색하나마 어떤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눈치다. 아니면, 이런 때에 지식인들이 어떤 해답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책인 듯도 하다.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아동교육에 평생을 바쳐온 고희의 아버지가 오랜만에 겸상을 받으며 DJP공조가 왜 깨졌다고 생각하는지 넌지시 물으신다. “아마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JP의 생존본능 때문이겠지요”라는 나의 지극히 평범한 대답에, “글쎄다, 두 사람간에 우리도 모르는 어떤 계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사뭇 음모론적 해석이 돌아온다. 한국의 정치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평생을 보낸 사람들에게까지 세상사를 음모론적 시각으로 보게끔 만들었다.

저녁 TV 뉴스를 보지 않은지 꽤 오래됐다. 마음을 정리하는 그윽한 시간이 세상의 혼잡한 일들로 오염되는 것이 싫어졌기 때문이다. 사건사고, 범죄, 비리, 고발, 경기침체 등으로 얼룩진 것은 어느 나라 뉴스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의 저녁뉴스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뉴스를 보고 흔쾌한 기분으로 잠을 청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권당 내분이 절정에 달한 듯한 요즘은 더욱 그렇다.

나라의 운명을 통째로 맡겼다는 의미에서 집권당은 국민이 의존하는 리더십의 요체이다. 카리스마적 인물의 온전한 통제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민주정부의 지배력은 집권당의 응집력과 위기관리 능력으로 좌우된다. 소수 정권일수록 내부 응집력은 더욱 절실해진다. 소수정권이 지배력을 키우는 방법은 다른 세력에게 정책적 공조와 동맹의 여지를 넓혀주는 일이다. 30%도 채 안 되는 낮은 지지율로 집권당 역할을 거뜬하게 해내는 이탈리아가 이런 일에는 모범적이다. 이탈리아 집권당은 한국의 민주당보다 훨씬 협소한 지역기반을 갖고도 거대한 연립내각을 이끌어간다. 소수 여당이기에 자주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여러 정당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정책동맹’의 창출 능력이야말로 지배력의 핵심일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집권 민주당은 개혁정책을 실행하면 할수록 오히려 동맹기반이 약화되는 대조적인 사례이다. 집권 전후를 통하여 그런 대로 광범위하게 결성됐던 개혁동조세력이 지금까지 얼마나 급속하게 이탈했는지를 생각하면 족할 것이다. 집권당은 개혁정책에 대한 왜곡과 비방이 집요하고도 동시다발적으로 시도됐기 때문이라고 변명할는지 모르나, 개혁을 거역할 수 없는 대세(大勢)로 정착시키는 것 자체가 지배력의 전제조건일진대 집권당으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JP의 이탈은 마지막 남은 보수세력과의 취약한 고리를 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JP와 결별해서 민주당 내부의 응집력과 이념적 동질성이 강화된다면 모르겠거니와 소수 정당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JP와의 결별은 아무래도 대북정책에 대한 DJ의 지나친 집착 외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제는 온전한 지역정당으로 돌아가서 마지막 승부라도 걸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대북정책 외에 다른 여타의 개혁정책은 포기해도 좋다는 뜻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살기 등등한 두 야당의 협력 없이는 이제 어떤 개혁정책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당 대표 인사문제를 계기로 터져 나온 내부 불만은 비단 ‘청와대 직할체제’에 대한 당의 자존심 표현만이 아니라는 점이 우려를 더한다. 이상하게도 민주당이 겪었던 주요한 갈등과 내분은 주로 인사문제였다. 인재풀(pool)이 유례 없이 작다는 세간의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그것은 민주당의 계파 리더들이 권력의 향배에 과민한 반응을 보였음을 뜻한다. 국가의 총체적 통치구조(governance)보다 당의 내부 주도권에 민감했다는 사실은 권력 승계를 둘러싼 치열한 각축전이 있어왔으며 대선 정국으로 접어들수록 다툼의 열기가 외부로 삐져나올 위험도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집권당의 내부 분열은 국민이 작은 위안이나마 구할 리더십의 상실을 의미하며 사회발전의 추를 멈추게 하는 중대한 사태이다.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할 탄탄한 지배력은 없을지라도 권력을 조용하게 관리할 최소한의 의무는 그런 대로 완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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