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파업 바로보기

  • 입력 2001년 6월 19일 18시 20분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을 기념해 가진 CNN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을 민주국가, 인권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현정권의 애착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그런데, 그 회견이 있기 며칠 전, 울산 효성공장의 파업시위는 특수 훈련된 요원들에 의해 40m 고공에서 무력 진압되었고, 민노총의 연대파업에는 불법이란 딱지가 붙여졌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언론은 파업시위의 폭력적 이미지를 확대하는 데 렌즈를 고정시켰다. 아무리 둘러봐도, 파업노동자의 요구와 속사정은 간 데 없었으며 대신, 발묶인 승객과 수출품, 신인도 하락에 대한 과도한 우려, 가뭄 기사가 자리를 차지했다. 대통령이 한발 앞서 '불법필벌(不法必罰)' 의 영(令)을 내렸으니 그럴 만도 하고, 연봉 1억원짜리 조종사들이 파업전선에 나섰으니 민심이 등을 돌릴 만도 하다.

구조개혁이 지지부진하고 경제가 풍전등화인 이 때 파업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감행했다면 그 배경과 이유를 분명히 알려야 한다. 그래야, 돌을 던지든지 격려를 하든지 할 것 아닌가. 파업은 없는 것이 좋다는 점을 전제로 두 가지만 지적하자.

우선, 항공사 파업이 과연 불법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행 노동법에 의하면, 단체교섭이 결렬될 경우 10일의 냉각기간이 경과하면 파업이 가능하다. 항공사 노조는 이 절차를 밟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부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한 것은 지방노동위원회의 '행정지도' 에 근거하고 있다. 노조에 내린 '더 교섭하라' 는 행정지침을 무시했다는 것인데, 대법원 판례에도 법적 구속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노동계의 주장이다. 즉, 행정지침을 남발해서 합법적 파업을 불법으로 몰고 있다는 것이다.

필수 공익사업에 적용되는 직권중재 명령을 어긴 병원노조의 파업은 명백히 불법이다. 그런데, 작년의 의료대란과 같은 혼란이 예견되는 때에 한해 직권중재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정부가 지레 겁먹고 손을 쓴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다른 사업체와 달리 24시간 가동돼야 하는 병원의 특수성 때문에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좀 불편해서 그렇지 병원노조가 파업한다고 의료서비스가 완전 중단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필수 공익사업의 범위가 너무 넓은 것도 문제여서, 국제노동기구(ILO)는 축소 권고를 이미 한국 정부에 보낸 상태이다.

둘째, 90년만의 가뭄에 파업을 감행한 것은 괘씸죄에 해당할 뿐 원칙적으로 가뭄과 파업은 관계가 없다. 물은 농민의 생명줄이고, 파업은 노동자의 생존권이다. '구조조정은 곧 실직' 이라는 인식을 각인시킨 정부정책이 파업의 타깃이라면, 가뭄 극복의 핵심은 미래 대응적, 체계적 물관리일 것이다. 4월 초부터 농민들은 가뭄을 걱정했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지 단수조치나 절수캠페인 한 번 안하고 뒤늦게 법석을 떠는 정부의 태도가 문제라면 문제다. 요 며칠 비가 올만큼 왔으니 뭐라 할 것인가.

같은 조종사라도 외국인이면 1억7000만원, 한국인이면 1억원을 받는 데 화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외국인 교수를 10만달러에 채용한다는 소문에 연봉 4000만원을 받는 '우수한' 교수들이 분기탱천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임금인상을 내세운 파업의 진짜 이유는 자존심의 회복인 경우가 많다. 의연하게 양보할 퇴로를 열어주지 않으면 파업으로 치달았던 것이 과거의 경험이다. 임금 외 수당인상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배경에는 경쟁사와의 자존심이 깔려 있다.

사회적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대한항공 노조는 파업 다음 날 연봉인상안을 철회했다. 다만, 안전운행준수위원회에 노사 동수 참여를 요구했는데, 근로자의 경영참여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은 대통령 100대 공약 중 여덟 번째의 약속이었다. 그것 때문에 노동자들은 표를 몰아주었을 것이다. 경영참여 확대가 경제회복에 반드시 긍정적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한국적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정확히 부합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지키지 못하겠다면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틈만 있으면 민주와 인권의 고귀함을 외치는 친노동 정권과 파업혐오증을 앓는 중상층의 눈치를 살피는 언론은 노동자의 입을 그렇게 막고 있는 것이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