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빗물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겠다.”
‘도시 속의 물’이라는 주제로 박람회를 벌이고 있는 독일 베를린시의 모토다. 빗물을 땅으로 흡수해 지하수를 축적하고 주택가마다 호수나 연못을 만들어 습도를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 독일에 장마는 없지만 만일의 경우에는 홍수방지 역할도 가능하다.
빗물은 우선 정원에 주는 허드렛물로 사용되고 땅속에서 자연정화된 뒤에는 상수도로 공급된다. 베를린 시민들이 음용수로 이용하는 상수도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침전 등의 물리적 처리만을 거친 것으로 화학적 처리는 일체 하지 않는다.
베를린 북동부에 위치한 마을인 헬러스도르프. 각 단지마다 5층짜리 아파트 3채가 ㄷ(디귿)자형으로 서있고 그 가운데 조그만 연못, 놀이터, 녹지가 형성되어 있다. 땅에는 한군데도 하수구가 없고 지면이 연못을 향해 완만한 경사를 이뤄 미처 흙으로 흡수되지 못한 빗물은 연못으로 흘러들어간다. 연못 주변에 촘촘히 박힌 바위와 수초는 유입되는 물을 한번 걸러주는 자연필터 역할을 한다. 지붕에 떨어지는 빗물도 전부 홈통으로 흘러들어 물탱크로 향하니 결국 버려지는 빗물은 한방울도 없는 셈이다.
이곳은 80년대 동독시절 형성된 주거지였다. 군대막사식의 획일적인 베드타운이었던 곳이 통일후 빗물관리 시범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몰라보게 달라진 것이다. 사실 빗물관리 시스템은 70년대부터 독일 학자들이 연구해 왔지만 빛을 보게 된 것은 90년대 들어서다.
통일이후 피폐한 구동독지역을 재개발하면서 20년 가까이 준비해온 기술들을 적용한 것. 여기엔 신도시개발 청사진을 민간업자와 엔지니어들에게 맡긴 정부의 민영화시책도 일조했다.
도시설계 엔지니어인 요한 하르틀은 “빗물관리 시스템이 많은 건설비용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하수처리비용은 줄어들기 때문에 손해가 아니다”라며 “호수로 인한 조경효과와 습도유지 등을 감안하면 백배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베를린 남부 변두리의 텔토뮬렌도르프는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총면적 5㏊규모의 신도시다. 이곳은 도로와 주택, 조경을 모두 새로 건설하는 만큼 빗물관리의 모든 노하우를 적용시키고 있는 시험무대. 구동독지역과 달리 3층규모의 연립주택 건물은 단지마다 모양과 색상을 달리했다.
보도에는 엽서 크기의 자연석이 깔렸는데 돌과 돌 사이에 틈새가 3㎝이상으로 넓다. 빗물 흡수를 돕기 위해서다. 특징적인 것은 차도와 인도의 물을 철저히 구분한다는 점. 법적으로 차도는 공용시설이고 인도는 주택지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 위에 떨어지는 빗물도 소유권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고다.
차도에 떨어진 빗물은 중간탱크로 집결, 한차례 필터를 거친 뒤 마을 한가운데 있는 호수까지 가고 인도에서는 가로수가 심겨진 녹지로 흡수되거나 각 단지마다 있는 지하물탱크로 향하게 된다. 평균 150㎥ 용량인 지하물탱크에서 건물 앞마당으로 연결된 수도는 정원수나 세탁수로 쓰인다.
이 지역 설계를 맡은 크라프트 설계사무소의 하트무트 보제는 “빗물도 엄연한 재산인 만큼 소유권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역시 크라프트사무소가 설계한 첼렌도르프의 주택가에는 수초와 바위 등으로 꾸며져 전혀 인공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 길이50여m의 수로가 있다. 비가 올때가 아니면 물이 흐르지 않는 이 수로는 주택가에 조성된 빗물받이용 연못의 물을 1년에 서너차례 통과시키는 역할을 한다. 연못의 물을 펌프로 퍼내 강제로 수로로 흘러보내는 것은 물을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수로를 지나는 동안 연못의 물은 바위와 수초를 통과하면서 다시 한번 정화된다. 그래서인지 이곳 연못에서는 피라미 잉어가 헤엄치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건물을 지탱하는 축대는 자연석을 쌓아 철사로 고정시켜 놓았다. 미처 홈통으로 모이지 못한 빗물은 돌틈으로 흡수된다. 게다가 철사망에는 담쟁이와 흡사한 푸른 식물들이 자생적으로 자라나 조경효과도 크다.
시설이 좋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보제는 “엘리트계층인 첼렌도르프 주민들이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베를린 시민들의 환경의식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엔지니어가 주거설계를 하기 전에 반드시 주민들과 공청회를 갖는데 주민들도 환경친화적 시설을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60년대 초에는 경제개발 과정에서 폐수가 하천을 오염시키자 시민들이 오염방지기준법을 제정하라고 집단행동에 나섰을 정도다.
독일 환경부의 물공급 담당 한스―베르너 묄러박사는 “벌금이 워낙 무거워 토양이나 하천을 오염시키는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다”라며 “기업가들이 한국같은 곳에 공장을 짓고싶다고 하는 이유도 환경 규제가 약해서 그런 것” 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슈프레강이 도심을 관통하는 베를린은 비교적 물이 풍부한 도시중 하나다. 그러나 20년후로 예상되는 물부족현상을 대비해 지금부터 지하수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에 20년,시행할때도 20년 앞을 봅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그만큼의 시간과 관심을 투자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니까요.” 한 독일 엔지니어의 말은 난개발로 얼룩진 한국의 국토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리골렌 시스템은?▼
리골렌(Rigolen·도랑)시스템은 베를린의 빗물 정화시설의 근간을 이루는 원리다. 공동주택단지의 앞마당처럼 커다란 구역부터 도로변 가로수지대에 이르기까지 규모의 차이를 불문하고 시설이 가능하다.
원리는 간단하다. 도랑처럼 오목하게 파인 녹지가 고여든 빗물을 일차적으로 흡수하면저 자연정화필터의 역할을 한다. 10∼20m간격으로 솟아올라있는 자갈기둥은 폭우가 쏟아져 ‘도랑’이 넘칠 경우에만 급속도로 물을 투과시키는 통로다.
토양층의 정화를 거친 물은 자갈층에 고여 보관된다. 깊이는 보통 2m내외. 이 물은 장차 소중한 수자원으로 활용된다.
자갈층을 관통하는 파이프는 하수구로 연결된다. 이 파이프는 아래쪽으로 구멍이 뚫려 있어 전체 자갈층에 물이 꽉 찼을 경우에만 물이 유입된다. 홍수를 대비한 장치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적은 거의 없다.
▼베를린의 도시계획은 민간 엔지니어 작품▼
베를린의 도시계획을 알고 싶다면 관청보다는 설계사무소를 찾아야 한다. 지방자치단체가 도로, 건축행정을 총괄하는 우리와 달리 베를린은 50년대부터 거의 대부분을 민간에 맡겼다.
FPB설계사무소의 헤르베르트 짐머만 팀장은 “우리의 역사가 도시의 역사”라고 단언한다. 35년 역사의 이 회사는 하천 정화시설부터 주거지 건설까지 안해본 사업이 없다. 베를린에는 이와 유사한 회사가 30여개에 이른다.
베를린에서 다양한 도시계획 실험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현실과 밀접히 관련된다. 회사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은 학계 전문가들과 연계를 갖고 그들의 연구결과를 시행에 옮긴다. 정치적 법적 결정은 계획을 추인해주는 수준. 정치가들이 결정한 사항을 용역으로 맡기는 것과는 반대의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체제는 100% 의도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2차대전후 경제가 망가진 상황에서 시정부는 부흥을 꾀할 돈과 능력이 부족했던 것. 그래서 민간으로 큰 사업들을 넘기기 시작했고 결과가 만족스러운 만큼 정착된 것이다. 또 60년대에 이미 지역별 토지사용용도를 엄격히 규정해서 집단민원을 차단한 것도 엔지니어들의 활동반경을 넓혀준 요인이다.
<베를린〓김준석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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