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디자인이 결정한다

  • 입력 1997년 6월 12일 20시 14분


몇년전 미국의 어느 경영학자가 쓴 글에서 「과거 기업들은 가격으로 경쟁했고 오늘날은 품질로 경쟁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디자인에 의해 기업의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라는 내용을 읽고 매우 공감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실제로 유럽지역을 대상으로 제품 구매시의 디자인 비중을 조사했더니 디자인의 중요성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눈앞에 와 있었다. 당시 고객들이 물건을 사면서 디자인을 고려하는 정도가 전자제품이 48%, 자동차는 38%, 산업용 장비가 3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소비자가 외국제품을 구매하는 동기를 조사해도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디자인이 좋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상품의 경쟁력은 기획력 기술력 디자인력의 세 가지 요소로 볼 수 있다. 이것이 과거에는 각각 더해지는 합(合)의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각각 곱해지는 승(乘)의 개념이 되었다. ▼ 디자인이 가격-품질보다 우선 ▼ 즉 과거에는 세 가지 결정 요소 중 어느 한 가지가 약하더라도 다른 요소의 힘이 강하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곱셈식으로 표시되는 요즈음에는 기획력과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디자인이 약하면 다른 요소까지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고, 결국 경쟁이 불가능해진다. 더구나 앞으로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가 진전되면 고객들이 원하는 대로 하나하나 다른 제품을 만들어 제공해야 하는 시대가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품을 보면 한결같이 디자인 마인드가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아직도 우리는 제품을 기술적으로 완성한 뒤 미적 요소를 첨가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디자인이라고 여기고 있다. 골프를 해본 적도 없고, 심지어 골프장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골프웨어 골프용품을 디자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삼성은 물론 대부분의 기업들의 상품 디자인에서 통일된 이미지를 찾을 수 없다. 반면에 자동차의 벤츠, 전자의 소니 등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우리 제품이 해외시장에 나가 일본 제품과 상대하게 되면 꼭 「마무리(finaltouch)」가 부족해서 문제가 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무리뿐만 아니라 외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 제품의 외관이 선진 제품보다 뒤지는 탓에 국내외 시장에서 고객에게 외면 당하고 제 값도 못받고 있다. ▼ 조기교육 통해 육성을 ▼ 한국의 문화가 배고 자기 회사의 철학이 반영된 디자인 개념을 정립하는 작업을 혁명 차원에서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치열해지는 경제 전쟁에서 배겨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 경영자는 젊은이들과 자주 대화하고, TV 인기 드라마도 보면서 유행을 알고 디자인 감각을 키워야 한다. 또 개별 제품의 디자인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해 섣불리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10대들이 쓰는 용품의 디자인을 50대 경영자들이 평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칫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결과를 가져온다. 디자인력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디자이너의 수준이다. 일본의 마쓰시타가 디자이너를 4백50명이나 보유하고 있는데 같은 전자 회사인 삼성전자는 1백30명 수준에 불과하다. 국내외에서 천재급의 디자이너를 확보하고, 어려서부터 감각이 있는 청소년들을 디자이너로 육성해야 한다. 또 디자이너들에게 세계 최고급품을 얼마든지 사서 쓸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등 경영자 못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명품(名品)이 나온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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