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36>卷三. 패왕의 길

  • 입력 2004년 4월 26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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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줄만 남은 法 ⑥

패공은 갑주와 투구 대신 수수한 문관(文官)의 옷에 뒷날 <유씨관(유씨관)>이라 불리게 된 죽피관(竹皮冠)을 썼다. 전에 사상(泗上)에서 정장(亭長) 노릇을 할 때 구도(求盜=亭에 속한 하급 吏卒)를 설현(薛縣)까지 보내 구해온 대나무 껍질로 손수 짠 관이었다. 그리고 덜렁 장검 한 자루만 찬 채 살찐 구렁말에 올라 장수들을 거느리고 함양 성안으로 들어갔다.

진나라의 엄한 법과 번거로운 격식에 오래 시달리던 함양의 관민들은 그런 패공의 부드러우면서도 넉넉한 풍채에 가슴을 쓸었다. 거기다가 군사들까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줄지어 뒤따르니, 진인이 천병을 거느리고 세상을 구하러 왔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눈으로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함양이 절로 안겨오듯 성문을 열고 초나라 군사를 맞아들이고, 성안에도 맞서는 세력이 아무도 없다는 게 알려지자 장졸들도 달라졌다. 백성들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만은 거침없이 드러냈다. 다투어 궁궐과 부호들의 창고로 달려가 그 안에 들어있는 금은과 비단을 나누어 차지했다.

하지만 소하(蕭何)만은 달랐다. 패현(沛縣)에서 유방이 처음 몸을 일으킬 때와는 달리, 지난 2년 거친 전장을 헤쳐 오느라 그랬는지 소하가 여럿에게 드러날 일은 별로 없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조용히 군막 깊숙이 앉아 군사가 늘어나고 줄어듦을 헤아리며 거기에 맞춰 곡식과 물자를 대는 일에만 골몰하던 소하였다. 그런데 함양에 들자마자 군사 여남은 명을 불러 말했다.

“나는 이제 승상부(丞相府)로 갈 것이다. 너희들은 빈 수레 몇 대를 구해 나를 따르라.”

그 말에 군사들은 소하가 승상부의 재물을 털려고 하는 줄 알았다. 자기들에게도 한몫이 돌아올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좋아라, 따라 나섰다.

그런데 승상부에 따라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소하는 재물이 들어 있는 창고는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도판(圖版)과 문서가 들어 있는 창고만 찾았다. 그리고 그 창고를 찾자 목소리를 엄하게 해 군사들을 재촉했다.

“여기 들어 있는 도판과 문서, 장부는 하나도 남김없이 수레에 실어라. 천하를 위해 요긴한 일이니 결코 소홀해서는 아니 된다.” 군사들이 퉁퉁 부은 얼굴로 창고에 든 것들을 여러 대의 수레에 옮겨 싣자 소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중 관중에 자리 잡을 때까지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귀하게 그 문서와 서류들을 갈무리하고 지켜냈다.

뒷날 패공은 그 누구보다 천하 각처의 형세와 득실에 대해 잘 알아 항우와의 쟁패(爭覇)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그 지식은 모두 소하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소하는 홀로 있을 때마다 승상부에서 얻은 도판과 문서들을 꼼꼼히 읽어 머릿속에 가지런히 새겨두었다. 성루(城壘)와 관애(關隘)는 어디에 어떤 높이와 두께로 서 있으며, 백성들은 어디에 얼마만한 머릿수가 모여 사는지, 들판은 어디가 기름지고 어디가 메마르며 산과 물은 어디가 험하고 어디가 순한지를 소하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편 함양으로 든 패공은 먼저 2세 황제가 마지막까지 거처했던 망이궁(望夷宮)으로 가 보았다. 그때 재물에 한눈팔지 않고 패공을 따르고 있는 장수는 몇 명 안 되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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