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41)

  • 입력 1999년 10월 10일 19시 39분


그런데 점점 아이가 자라 십대 소년이 되어 사진 속에 나타난다. 우리는 이미 그 소년의 얼굴 속에서 세상은 고해라는 사실을 알아보게 된다. 아직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지만 청년이 되었을 때 한 사나이의 이마에 그려진 세속적인 고뇌의 흔적을 뚜렷이 알아볼 수가 있었다. 어떤 면으로는 투옥된 장기수 자신이 세파를 헤쳐가고 있는 가족들의 얼굴보다 맑았다. 나는 혈육의 정에 시달리는 선배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이 깊은 밤에 변소 창문 앞에 나와 서서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침 운동시간에 얼굴을 마주치면 말짱했지만 나는 그가 사동 빈터를 하염없이 걸으며 가끔씩 푸르게 펼쳐진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고 있는 걸 훔쳐 보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은결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마음고생으로 간혹 시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얼마나 풍요했을 건가. 마음이 물결처럼 파동치는 나날을 두려워할 게 아니다. 원래 사는 일이 그렇지 않았던가.

읍내는 내가 며칠 전에 이곳으로 올 적에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훨씬 커 보였다. 아파트도 들어서 있었고 중심가는 승용차로 가득차 있었다. 여전히 다방은 많아서 비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도 앞집 옆집 하는 식으로 붙어있을 지경이었다. 나는 간판으로 내부를 짐작해 보면서 될 수 있으면 한적하고 친절한 집이 어디일까를 가늠했다. ‘낙원’다방이 보였다. 이름으로도 그렇고 일본식의 나지막한 이층집 모양도 그래서 아마 읍내의 초창기부터 있었던 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가만 있어 봐, 내가 언젠가 윤희와 같이 다리쉼하러 들어갔던 곳이 아닌가. 나는 이층으로 오르는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전에는 삐걱이는 소리가 나던 낡은 나무 계단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카펫을 씌워서 그 아래 새 계단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옛날의 그 집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는 조잡한 합판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화장실 들어가는 출입구가 낯이 익었다. 그 옆에 작은 원형 창문이 그대로 있었다. 전에는 그 아래 분재 한 그루가 놓여 있었다. 제법 나이 먹은 향나무 분재가 놓여 있어서 창은 그럴 듯했지만 화장실 옆이라 장소가 맞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이따가 화장실에 들어가 보겠지만 세면대가 있는 곳에서 창으로 보면 작고 낡은 한옥의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내가 한참이나 휘둘러보며 입구에 서 있었는데도 어쩐 일인지 안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장사를 안하는 집인가.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담배 한 대를 피운다. 주방 안쪽을 보니 미닫이가 달린 방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부러 인기척을 내느라고 헛기침을 했고 여자가 방에서 나왔다.

어머, 어서 오쇼.

여자는 사십대의 몸집이 좋은 아낙네였다. 차는커녕 어디 밥집에서 국밥을 말고 앉았으면 어울릴 것 같은 푸근한 인상이다.

차나 한 잔 주시오.

그네는 밖으로 나서지도 않고 주방에 서서 내게 물었다.

뭔 차를 드릴까요?

글쎄….

전화를 얻어 쓰려면 좀 비싼 걸 시켜야 하지 않을까. 예전부터 어른들은 쌍화차를 시켜 먹던 게 생각났고. 마담 언니에게도 한 잔 권해야 하지 않을까.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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