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36)

  • 입력 1999년 10월 4일 18시 38분


영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나 지난 뒤였다. 전에도 한참이나 연락이 끊겼던 적이 있었지만 학교에 나가면 대개는 누군가가 영태의 근황을 알려주기 마련이어서 어디쯤에서 돌아다니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내에도 쉴새없이 시위가 계속되고 있어서 모두들 송 아무개가 어디로 새어 버렸는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포 어름을 지나다가 버스 안에서 내가 영태와 함께 찾아갔던 오피스텔 빌딩을 보고는 차에서 내렸다. 십일 층이었을 거야. 짐작대로 복도를 돌아서 찾아간 도어 앞에는 ‘번역실’이라고 써서 스카치 테이프로 붙인 작은 종이쪽지가 보였다. 망설이다가 노크를 해보았다. 문이 열리는데 바로 그날 밤에 본 적이 있던 김 선배였다. 그가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어쩐지 방 안은 전보다 더욱 좁아진 것처럼 보였다.

어서 오시오.

그는 내가 먼저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늉을 했다. 전에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사무기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책상이 두 개 더 늘어나고 응접 세트는 치워 버렸다. 아마도 김의 자리는 맨 안쪽 창문을 등진 자리일 테고. 왼쪽 벽가에 붙여 놓은 책상 앞에는 다른 사람이 엎드려서 뭔가 끄적이고 있었다. 김 선배가 자기 자리로 들어가서 앉기 전에 옆에 놓인 접는 의자를 가리켰다.

이리 앉으세요.

우리는 문을 향하고 나란히 앉은 셈이다. 나는 낯선 사람을 건너다 보고 나서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변했네요….

예? 아아 그렇게 됐습니다. 얼결에 덤터기 써 버렸어요.

하더니 김은 책상 위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정형 인사하지. 이쪽은 영태 친구되는 분인데.

그는 말없이 목례를 해보였다. 김 선배가 터 놓고 말을 시작했다.

송가 녀석이 자취를 감춰 버리는 바람에 여길 떠맡게 되었어요. 그냥 집세만 날릴 수도 없구 해서 우리들 밥벌이터로 만들었지. 번갈아 일거릴 가지구 나와서 푼돈을 벌구 있어요.

송형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아 모르고 계시던가? 그 친구 수배 중이오. 미 문화원 농성 이후로 뒤에서 뛰던 친구들까지 몽땅 사라졌소.

아무렴 연락할 길은 없겠지 열나게 찾아 볼 생각도 없으니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가 서랍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꺼냈다. 경조사에도 돈 봉투로 쓰는 우체국 표준 사이즈의 그것이 아니라 주제넘게 붉고 푸른 줄이 쳐진 넓적한 항공 봉투였다.

튀기 바로 전날 여기서 보았어요. 지금쯤 꽁꽁 숨었을걸. 그 광주 팜플렛이 전국의 대학과 노동 현장으로 퍼져 나갔거든. 책도 지하에서 나와 버렸구요. 지난 겨울부터 차례로 진행된 프로그램이었으니까.

나는 송영태의 편지인 듯싶은 봉투를 백에 넣고 일어서려는 기색을 보였는데 김 선배가 말했다.

너무 걱정은 말아요. 송가는 그래 봬도 원래 도련님이니까 어디 경치 좋은 데서 독서나 하구 있을 거요.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제 막 왕성하게 짙어가고 있는 가로수의 신록이며 한낮이라 인적이 많지 않은 거리도 걷기에 괜찮았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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