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35)

  • 입력 1999년 10월 3일 20시 11분


늙은 엄마에게 혼자 사는 것의 청승을 보여주기가 싫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은결이에게 감기 몸살을 옮겨 주기도 싫었고. 나는 불을 끄고 다시 어둠 속에 몸을 눕혔다. 속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없었다. 이불을 머리 위에까지 푹 뒤집어쓰고 낙서처럼 머리 속에 희미한 글자를 썼다.

내가 제일 예뻤던 때 거리는 사방에서 무너지고 생각도 않던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제일 예뻤던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들판에서 이름도 없는 산에서 나는 멋부릴 실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제일 예뻤던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 밖에 모르고 깨끗한 눈짓만을 남기고 모두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또 무엇을 썼는지. 그의 말을 썼을 거야. 폭풍우의 날에도 시간은 지난다고. 흡혈귀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이 희멀건 사람이 서서히 쭈그러지고 서랍 속에 잊혀졌던 감자나 사과 모양 검게 변하여 오그라들면서 폭삭 주저앉아 모래 흙이 되다가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 날아가 버리는 세월. 손아귀 사이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가는 물처럼. 어느 장기수의 책에서 보았던가. 목사가 기도하면서 그러더래. 감옥생활도 당신 인생의 일부분입니다. 부분이 어디 있어. 현존만이 있는데. 지금 연주되고 있는 악기의 소리처럼 사라지고 있는데.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나는 앓고 일어났다. 아니 앓았다기 보다는 뭔가 마음과 몸에 남아 있던 이십대의 독들이 염색물이 맑은 물에 씻겨 빠져 나가듯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나는 꼼짝도 않고 몇 끼니 먹지도 않고 절망도 하지않고 그냥 벗어 놓은 옷가지 같이 구겨져 있었다. 일어나 거리로 나가니 꽃이 만발한 나른한 봄날이었다. 이미 목련은 흉하게 떨어져 누런 몰골을 시신처럼 늘어뜨리고 있었다. 동네 공동 목욕탕에서 우두커니 샤워 꼭지 앞에 서서 거울 속에 비춘 내 나신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흔적이 허리에 남은 듯도 싶고. 그리고 물을 끼얹고 슬슬 비누 칠을 하고 또 비처럼 쏟아지는 샤워 물 줄기를 맞고. 아줌마를 불러서 때를 밀었다. 체격이 남자 같은 때밀이 여자는 나에게 방향을 바꾸라고 가끔씩 옆구리나 궁둥이를 슬쩍 치고는 했다. 나는 그네의 작업이 모두 끝난 다음에도 그냥 비닐 평상 위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날, 저녁에 밥을 지어 혼자 화실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물에 말아서 갈치 조림하고 김치하고 어머니가 보내온 밑반찬 두어 가지를 늘어 놓고서 그리고 다른 집에서 하는 짓과 똑같이 텔레비전까지 켜 두었다. 물에 만 밥은 잘도 넘어간다. 텔레비전 화면에 뭔가 나타났다. 아니, 저게 뭐야. 기자가 화면 밖에서 떠들고 있었다. 광주에서의 미국의 책임을 묻겠다며 젊은이들이 미국 문화원에 돌입했다고 한다. 화면에 그들이 보인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준비한 플래카드와 지금 막 쓴 듯한 구호를 창문 쪽에 내밀고 흔들었다. 그들이 뿌리는 유인물이 나뭇잎처럼 나부껴 떨어졌다. 미국이 광주학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소리는 학교의 대자보에서는 늘 보던 소리였다. 화면 안에서 나는 영태와 함께 화실을 드나들던 몇몇 얼굴들을 알아 보았다. 팜플렛을 만들던 그때가 벌써 시작이었는데.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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