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77)

  • 입력 1997년 3월 24일 07시 47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32〉 『나한테 이야기를 하고 나면 나아질 것 같습니까?』 그는 연민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냥 누구에겐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럴 사람이 없었어요. 여기까지 김운하씨를 찾아온 것도 저를 알아봐달라는 뜻이 아니었어요. 그냥 그쪽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편해지고 있나요?』 『모르겠어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데요?』 『이제 이 기숙사를 나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와서 그런가요?』 『꼭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그럼…』 『이 기숙사가 어떤 기숙사인지 댁은 알 것 같은데요』 『그런 뜻으로 온 건 아니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저는 일어설 수 있어요』 『그럴 것까지는 없구요. 이야기를 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아뇨. 올 때는 그러고 싶었는데, 막상 그쪽을 보고 나니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서 말입니까?』 『아뇨. 그냥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요. 그런데…』 『그런데, 뭐죠?』 『예전에도 제가 이상해 보였나요? 부대를 찾아가고 했을 때…』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냥 슬픔이 커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래요. 그냥 산다는 게…』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스물 세살이거나 네살쯤 된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깊고 쓸쓸했다. 이 세상의 모든 쓸쓸함이 여자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듯했다. 여자는 그런 자세로 앉아 한숨을 쉬기도 하고, 초점을 잃은 듯 멍한 얼굴로 실내의 다른 빈 자리를 바라보기도 하다가 아홉시 이십분쯤 『이제 일어서야겠어요』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운을 내십시오』 카페 앞에서 그는 여자를 배웅했다. 어둠 속으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저만치에서 한번 그를 돌아보았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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