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레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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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방학 동안 다른 도시에 가 있게 된 한 사진학과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첫 번째 연말 선물을 받았다. 냉장고도 다 비웠고 이제 내일 출발하면 된다면서 나에게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봉투에 든 것을 확인한 순간, 몇 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미국 아이오와에서 석 달 동안 세계작가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을 때였다. 가깝게 지냈던 일본 작가가 먼저 떠나게 되었는데 송별회를 마친 후 슬쩍 내 쪽으로 묵직해 보이던 쇼핑백을 주었다. 그러곤 고심 끝에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는 표정으로 “이걸 믿고 맡기고 갈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말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보니 그 안에 든 것은 프랑스산 소금, 통후추,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

 베를린 반제 호수 근처에 있던 ‘작가의 집’에서 지낼 때는 아이슬란드 시인이 싱싱한 바질 화분을 주고 떠났다. 공동 부엌에서 파스타를 요리할 때 몇 장씩 이파리를 따서 쓰던 허브였다. 몇 년 전 상하이에서는 역시 제 나라로 일찍 돌아가게 된 소설가가 멸치 올리브절임과 달걀을 포장해 주었고. 친했던 멤버들이 몇 명 더 있어도 식재료 같은 것만은 나에게 맡기고 싶었던 모양일까. 물론 나는 그들의 예상대로 그 재료들을 요긴하고 알뜰하게 쓴 게 사실이다.

 사진학과 선생이 준 봉투에는 향초 외에 플라스틱처럼 단단하고 샛노란 레몬 두 알이 들어 있었다. 며칠 전에 나도 여섯 개들이 한 팩에 5800원 주고 사둔.

 언제부터인가 감기 기운이 느껴지면 레몬부터 찾게 되었다. 소금으로 표면을 문질러 닦아 뜨거운 물에 즙을 내서 먹거나 생수에 레몬 조각을 넣고 마시면 도움이 되니까. 새로 생긴 레몬을 냉장고에 넣어두려는데 그 하나의 무게가 “모든 아름다운 것을 중량으로 환산한 무게”라는 표현이 나오는 가지이 모토지로의 단편소설 ‘레몬’이 생각나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초조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거운 마음으로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니던 주인공이 어느 날 밤 과일가게에서 뜻밖에 레몬을 보게 되어 한 알 산다. “레몬옐로의 그림물감을 튜브에서 짜내어 응고시킨 듯한 그 단순한 색깔”과 “위아래가 오그라들어 안이 꽉 찬 방추형 모양”이 주인공의 집요했던 우울함을 달래주게 된다는 짧은 이야기.

 가족이 모인 주말에 스파게티를 만들다가 쓰고 남은 토마토와 양파를 다져 살사소스도 만들고 마지막에 레몬즙을 뿌려 완성했다. 노랑은 긍정적인 기운을 느끼게 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색깔이라고 한다.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이 아쉬운 점 하나 없이 후련하기만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 이 지면을 넘기는 순간만이라도 밝고 명랑해 보이는 레몬의 노란빛을 선물처럼 나눠 갖고 싶다. 물론 레몬은 사물이 아니라 과일이지만.
 
조경란 소설가
#레몬#베를린#반제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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