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20선]<1>럭키경성

  • 입력 2008년 8월 26일 03시 01분


◇ 럭키경성/전봉관 지음/살림

《“행사장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클리블랜드 대통령임을 알게 된 박정양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와 충성의 표시로 세 번 배례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대통령 수행원들이 돌출행동을 제지하고 일으켜 세우자 박정양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서를 넣어온 상자의 열쇠를 찾지 못해 한동안 소동이 벌어졌고, 며칠 동안 준비한 취임사 원고를 호텔에 두고 오는 바람에 처음부터 끝까지 횡설수설하다 취임사를 마쳤다.” (‘해프닝, 해프닝, 해프닝’ 중에서)》

협잡-투기꾼과 우아한 거부들

1925년경 황무지나 다름없는 함경북도 나진 땅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450만 평을 매입해둔 이가 있었으니 훗날 이 땅 덕에 천만장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김기덕이다. 일본의 종단항 건설 사업지로 웅기, 청진을 제치고 나진이 선정되자 그는 일약 부동산 거부로 떠오른다. 쓸모없는 돌섬까지 사들이며 ‘정신 나간 놈’이란 비아냥거림을 들었지만 폭등을 거듭한 땅 값 덕에 수백 배 차익을 남긴 것. 오늘날에도 사회 문제로 지적되는 부동산 투기의 원조를 보는 듯하다.

조선시대 슈퍼개미들의 눈물나는 분투기도 있다. 미두(쌀) 시세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거래한 덕에 의도대로 자금을 확보하고 미련 없이 미두 판을 떠난 냉혹한 승부사 유영섭, ‘칼 물고 뜀뛰기’ 하는 투자 방식으로 미두 시장에서 운 좋게 원금을 불렸으나 증권회사 설립 후에도 그런 방식을 고수한 탓으로 3년 만에 빈털터리가 된 김귀현 등 한몫 잡기 위해 미두시장과 주식시장을 누볐던 개미들의 흔적이 기록돼 있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등 사회주의 문학 단체를 주도했던 김기진도 등장한다. 그는 호구지책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재직하며 낮에는 주식중매점, 밤에는 조간신문 편집의 ‘이중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금광 등 큰 사업도 해봤지만 주식 매매는 오직 총명한 판단으로 짧은 시일 내에 일확천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고록에 적어 놓았다.

근대 조선을 들썩였던 투기 열풍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관해 다룬 이 책은 근대인들의 ‘돈’에 관한 욕망을 재현한다.

주식시장에 얼쩡거리면서 주가의 등락을 놓고 도박을 벌였던 합백꾼들, 미두시장에 뛰어들었다 전 재산을 잃고 미치광이가 된 사람들… 당대를 휩쓸었던 땅, 광산, 주식 열풍을 읽다 보면 재물에 대한 욕망이란 부동산, 주식, 펀드에 열광하는 현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서툴지만 당시 희소가치가 높았던 영어 실력 하나로 출세 가도를 달린 이하영, 고종의 명으로 미국으로 파견된 박정양 공사 일행이 미국 대통령 앞에서 당황해서 배례하는 해프닝 등을 접하면 시대상까지도 엿볼 수 있다. 흑백사진처럼 단조롭던 근대는 어느새 인간들의 욕망과 애환이 섞여 역동하는 컬러의 시대로 다가 온다.

이 책은 투기 소동에 관한 소극들뿐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근대의 거부들도 소개한다. 사업에서 망했지만 절치부심 끝에 금광 왕이 된 이종만은 번 돈을 소작농을 위한 ‘자영농 육성사업’을 위해 쓴다. 보부상으로 시작해 거부가 된 이승훈은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를 받아 오산학교를 세운다.

역동적인 우리 근대의 모습이 저자의 맛깔 나는 문체와 수많은 자료로 재구성된 책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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