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브랜드]‘휴먼 브랜드’ CEO가 기업이다

  • 입력 2006년 10월 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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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정주영 당시 국민당 대표가 국회 연설을 위해 단상에 올랐다.

정 대표는 그 해 4월 총선 때부터 화제가 됐던 ‘아파트 반값 분양’ 공약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아파트 반값 분양 공약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수도권은 반 값, 지방은 지금의 3분의 2 수준에서 분양할 수 있습니다.”

휴먼 브랜드…CEO가 기업이다
특집기사목록

▶ “희로애락 함께” 섬기는 CEO 뜬다

▶ 브랜드 찾는 남자가 어때서…

▶ “그 사람 △△아파트에 산대”

▶ 한국 눈높이, 세계 눈높이까지 차오른다

▶ 전통과 첨단유행 사이… 찬란한 ‘영국의 자존심’

이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래봬도 제가 아파트 싸게 짓는 데는 알아주는 전문가입니다.”

연설을 듣던 국회의원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파트 반값 분양이라는 터무니없어 보인 이 공약이 그 해 총선과 대선에서 줄곧 화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공약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정주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주영이라는 이름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주영이라면 한번 하겠다고 결심한 일은 반드시 해낼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룹 경영권이 2대째로 넘어오면서 현대는 2세들의 지분에 따라 뿔뿔이 갈라섰다.

하지만 아직도 현대라는 브랜드를 사용하는 기업에는 뚝심과 근성의 유전자가 굳게 자리 잡고 있다.

정주영 창업주가 만든 휴먼 브랜드가 주력 회사들이 완전히 계열 분리된 지금까지도 ‘현대’라는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 휴먼 브랜드, 그것은 기업의 힘

비즈니스위크, 포브스 등 유명 경제잡지에서 커버스토리를 가장 많이 장식하는 주역은 기업이 아니라 최고경영자(CEO)다. 심지어 커버스토리가 순수한 기업 이야기일 때도 사진은 기업 대신 그 기업을 상징하는 CEO를 싣곤 한다.

CEO들이 성공한 유명인사여서일까. 그보다는 CEO의 브랜드 파워가 해당 기업의 브랜드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라는 게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세계적인 기업 컨설팅·홍보 업체인 버슨-마스텔러가 미국 경제전문가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CEO가 그 기업의 평판에 미치는 영향은 1997년 40%에서 2003년 50%로 계속 높아지고 있다.

CEO 브랜드가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사례도 적지 않다. 펜실베이니아대 경영학과 데이비드 라커 교수는 “CEO의 평판이 10% 좋아지면 그 기업의 시가총액은 24% 늘어난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 창업주의 정신, 1세대 휴먼 브랜드

한국에서도 창업주의 정신이 그 기업의 브랜드를 지배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인재의 삼성, 뚝심의 현대, 인화의 LG 등 한국 대표기업들이 오랜 기간 쌓아 온 브랜드 이미지는 사실상 창업주들이 만든 휴먼 브랜드였다.

인재 등용을 경영의 제일 원칙으로 삼았다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철학은 오늘날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원동력이 됐다.

실제로 삼성은 최장수 CEO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그룹으로 유명하다.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 삼성SDI 김순택 사장 등 그룹을 상징하는 정보기술(IT) 분야의 스타 경영자들은 대부분 2000년과 2001년에 등용된 장수 CEO다.

윤 부회장은 1992년 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이사 사장을 지낸 것부터 따지면 15년째 CEO로 활동하고 있다.

또 김 사장은 올해 모든 신입사원의 부모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는 등 감성 경영으로 인재 중심주의라는 삼성의 브랜드 이미지를 이어 가 화제를 모았다.

○ 신뢰와 전통의 중견 기업 휴먼 브랜드

휴먼 브랜드는 초거대 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비자와 주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전통의 중견 기업에도 창업주의 신실한 휴먼 브랜드가 살아 있다.

35년 전 세상을 떠나면서 주식과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는 아직도 유한양행 브랜드의 중심에 서 있다.

후대의 전문 경영인들은 “유 박사의 유지인 정직과 신뢰, 노사 화합의 정신을 받들겠다”고 다짐한다. 이를 두고 사무가구 전문기업 퍼시스의 손동창 회장은 “유 박사는 떠났지만 유한양행은 여전히 그의 창업정신이 살아 숨쉬는 회사”라고 평가한다.

사무기기 전문기업 신도리코가 갖고 있는 ‘노사 화합과 주주 우선주의 기업’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도 창업주 우상기 회장의 휴먼 브랜드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 회장은 작고하기 전 “회사가 돈을 벌면 30%는 회사를 위해 남겨 두고, 나머지 30%는 종업원을 위해, 30%는 주주를 위해, 10%는 사회를 위해 쓰라”는 유지를 남겼다. 그의 ‘3 대 3 대 3 대 1’ 원칙에 힘입어 신도리코는 주주 중시와 노사 화합 분야에서 가장 모범적인 기업이 됐다.

○ 21세기형 휴먼 브랜드를 열어 가는 2세대들

1세대 휴먼 브랜드가 절대적인 카리스마에 바탕을 둔 창업주의 브랜드였다면 2000년대부터는 새로운 형태의 2세대 휴먼 브랜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세대 휴먼 브랜드의 핵심은 전문성을 중심으로 한 경영인의 브랜드다. 특히 첨단 과학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소비자들은 CEO 브랜드에 대한 신뢰를 제품에 대한 신뢰로 연결하는 경향이 커졌다.

이런 환경 속에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실력, 그리고 개방된 주식자본주의에 걸맞은 도덕성을 갖춘 2세대 휴먼 브랜드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만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낸 전문가라는 점. 휴먼 브랜드가 ‘영웅’에서 ‘전문가’로 변화한 것이다.

안철수연구소의 안철수 이사회 의장, 미래에셋금융그룹의 박현주 회장 등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업을 일군 2세대 휴먼 브랜드의 간판스타다.

창업주가 아니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휴먼 브랜드를 일군 전문 경영자형 브랜드도 속속 등장했다.

‘황의 법칙’을 선언한 삼성전자 황창규 사장, 인화의 LG를 ‘1등주의 LG’로 탈바꿈시킨 LG전자 김쌍수 부회장, ‘21세기형 은행장’이라는 별칭을 얻은 국민은행 김정태 전 행장, 구조조정 전문가로 명성을 떨친 동원시스템즈 서두칠 부회장 등은 21세기형 휴먼 브랜드의 모델을 제시했다.

○ 휴먼 브랜드의 핵심은 사람

훌륭한 휴먼 브랜드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브랜드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휴먼 브랜드를 띄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경영자의 연봉을 높이고 전략적인 언론매체 노출로 CEO 이미지를 관리한 기업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경영자의 브랜드 수명은 대부분 짧았다.

사람들의 머릿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휴먼 브랜드의 소유자들은 자기 홍보보다는 기업을 키우는 데 더 많은 힘을 쏟고 업적으로 가치를 평가받았다. 휴먼 브랜드의 핵심은 마케팅이나 홍보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능력과 인물 됨됨이라는 얘기다.

LG경제연구원 정지혜 연구원은 “진정한 휴먼 브랜드는 CEO 자신이 스타가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열정으로 기업을 스타로 만드는 것”이라며 “반짝 인기를 끄는 휴먼 브랜드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기업을 이끌 수 있는 진정한 휴먼 브랜드의 구축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글=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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