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터지는 여자들]<4>아내는 가구인가

  • 입력 2005년 9월 1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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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45·서울 강남구 신사동) 씨는 살쪘다고 남편이 구박할 때마다 자존심이 상한다. 일요일 오전 9시 아침 먹고 교회 다녀와서 점심 먹는 게 뭐가 잘못됐는지, 남편이 “또 먹느냐”고 할 때 서럽다. 남편은 같이 다닐 때도 앞서서 걸어간다. 김미화(가명·46) 씨는 얼마 전 남편 대학동창 부부 동반 모임에 다녀와서는 남편과 크게 다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그 친구 마누라 예뻐졌지”라고 몇 번이나 얘기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해 한 벌밖에 없는 여름정장을 옷걸이에 거는데 “당신 그 옷 입고 있으니 (그 마누라의) 언니나 이모 같더라”고 한마디 더했다.》

아내도 여자다. 외모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돈과 시간 문제로 가꾸기를 유보했을 뿐이다. 그러나 남편들은 아내를 언제나 집 안에 있는 가구쯤으로, 원하면 언제나 밥과 옷을 주는 ‘친절한’ 파출부쯤으로 여긴다.

최근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주부 4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76.4%가 ‘외모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답했다. 40%는 자신의 신체 부위에 대해 성형수술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 비만클리닉은 입원할 필요도 없어요. 아침에 뱃살과 허벅지살 1.5kg을 빼는 지방흡입술을 하고 와도 남편들이 모르니까 대부분의 주부들이 남편 몰래 하고 돌아갑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비만클리닉 전문의의 얘기에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무관심을 엿볼 수 있다.

박경희(가명·53) 씨는 그동안 자식 대학 보내고 남편 뒷바라지 열심히 했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머리 질끈 묶고 통치마 입으며 ‘여자’보다는 ‘아내’ ‘엄마’로 살았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TV를 보는데 남편이 “왜 마누라는 여자로 보이지 않을까?”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박 씨는 “아유, 나도 꾸미고 살아야겠네”라며 농담을 건넸다. 그런데 남편은 “당신은 저쪽 사람들과 계통이 다르잖아. 뭘 꾸며. 그대로 살지”라고 핀잔을 줬다.

박 씨는 어이가 없었다. “열심히 살기 위해 여자로서의 매력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배신감이 느껴지더군요.”

황인순(가명·52) 씨는 최근 큰맘 먹고 옷 한 벌을 샀다. TV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보다가 재활용품 모아 놓은 데서 옷을 고르는 주인공 맹순이가 자신의 처지와 너무 비슷해 괜히 심란해졌다. 황 씨는 “이제 그만 그악해지자”고 생각하며 백화점에서 30만 원짜리 옷을 샀지만 남편 눈치 때문에 옷장 안에 넣어두고만 있다.

대화전문가 이정숙(李貞淑·SMG 대표이사) 씨는 “남자는 사냥꾼이어서 이미 잡은 사냥감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남편 앞에서 함부로 옷을 갈아입거나 맨얼굴을 보여 주면 남편은 아내를 잡은 사냥감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처지는’ 자신의 몸매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것뿐이 아니다. 주부들의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마흔 지나 몸매가 변했더니 남편의 눈길도 달라졌다’는 고백이 종종 올라온다. ‘어디 가서 바람을 피우는 건지 요즘 잠자리가 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오죽하면 미국에서는 아내가 유방암 걸린 것을 남편이 제일 먼저 발견한다는데 한국 아내들은 목욕탕 ‘때밀이’들이 일러 준다는 얘기가 있을까.

강현미(가명·41) 씨는 얼마 전 싫다는 남편을 끌고 부부클리닉을 찾았다. 벌써 1년 가까이 남편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늙어 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다. 남편은 퇴근 후에도 강 씨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리고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에 푹 빠져 산다.

우연히 강 씨는 남편이 거의 매일 야한 사이트를 들락거리는 것을 알게 됐다. 어이도 없고 화가 나서 강 씨가 “당신 변태 아냐? 아내를 옆에 두고 그런 것들이나 보고…”라고 쏘아붙였다. 처음에 당황하던 남편은 그러나 곧 “당신이 여자야? 흥분이 돼야 하더라도 뭘 하지”라고 빈정댔다.

‘이제 나는 여자가 아닌가?’ 그런 고민 끝에 남편과 부부클리닉을 찾은 것이다.

서정애(가명·41) 씨는 얼마 전 남편 몰래 ‘큰일’을 저질러 버렸다. 남편이 해외 출장 간 틈을 타 600만 원이나 들여 유방확대수술을 받은 것. 뒤늦게 남편이 이 사실을 알고 대판 싸워야 했지만 그래도 서 씨는 상관하지 않는다. “마흔 넘어 처지는 몸매를 보는 게 안타까웠는데 볼륨이 있어 좋잖아?”

사실 서 씨는 성형수술에 관심이 없었다. 다 남편 때문이었다. 언젠가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였다. 평소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던 남편이 대뜸 “가슴이 그게 뭐냐? 노인네처럼…”이라고 타박하는 게 아닌가.

서 씨는 화가 나서 “그럼 수술할 테니 돈을 달라”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남편은 혀를 끌끌 차며 “돈 아깝게…. 그런다고 아가씨 되냐?”며 무시했다. 서 씨는 ‘그래. 두고 보자’라고 별렀고 남편 몰래 신용카드를 들고 가서 수술을 해 버린 것이다.

이화여대 함인희(咸仁姬·사회학) 교수는 “서구의 낭만적 사랑이란 개념이 들어오면서 부부간에도 날씬한 몸매와 성적 매력을 요구하고 있다”며 “결혼하면 사랑이 식는 것이 아니라 익는 것임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부부간 편안한 관계를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하면서 친구처럼 함께 늙어가는 우리식 부부문화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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