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터지는 여자들 2005 한국의 중년]<3>“이것 해줘…”

  • 입력 200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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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아들인 진수를 왕처럼 ‘모시고’ 사는 김숙자(가명·45) 씨. 남편은 “진수는 공부 잘하고 있나”라고 수시로 묻는다. “그렇다”고 답은 하지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동안 김 씨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아들을 교육해 왔다. 김 씨는 몸이 아파도 정보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엄마들 모임에 꼬박꼬박 나갔다. 이웃 엄마들이 추천하는 소위 ‘명문학원’에는 새벽부터 줄을 서서 등록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아들과 충돌이 잦았다. “엄마, 이렇게 한다고 대학 갈 수 있는 거야?”》

아들의 짜증이 늘자 남편은 “당신이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라며 아내만 나무랐다. 그리고 아이 문제는 십중팔구 부부싸움으로 불길이 번졌다. 남편에게 “평소에 신경이나 쓰느냐”고 대들지만 남편은 “당신이 (애한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지 않느냐”며 등을 돌린다.

김 씨는 요즘 밤중에도 몇 번씩 일어나 ‘이러다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가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한국에서 중년 여성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식들의 대학 진학 문제다. 자녀의 성적표가 바로 엄마의 성적표로 통하기 때문. 좋은 학원을 알아내고, 학원 스케줄을 짜고, 학원에서 학원으로 승용차로 이동시키며 몸이 허약할까봐 때때로 보약도 지어다 바쳐야 한다.

‘왕자’ 아들, ‘공주’ 딸을 모시고 사는 엄마에 대한 자식들의 요구는 끝이 없다.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엄마가 져야 한다. 한 입시학원의 ‘2006년 대학입시설명회’에 참석해 경청하고 있는 엄마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영희(가명·48) 씨는 지난해 큰딸이 고3이 되면서 남편과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오롯이 뒷바라지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가 학원 수업을 받는 동안 승용차의 흐릿한 불빛 아래서 취약과목의 요점정리도 해주었다.

그러나 자식 일이 늘 엄마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딸이 소위 명문대 진학에 실패한 것.

낙방 소식을 듣자마자 남편은 “당신, 도대체 뭐했어”라며 도끼눈을 떴다. 조 씨는 딸에게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내가 부족해서 딸이 대학에 떨어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대한민국 40, 50대 엄마들은 ‘원더우먼’이 돼야 한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만능 엄마를 이르는 ‘슈퍼 맘’이 아니라 자식들의 높아진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울트라 슈퍼 맘’이 돼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집안일과 가족 뒷바라지는 기본이다. 거기에다 자녀가 공부를 못하면 엄마는 주변에서 ‘자격 미달’ 취급을 받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권원숙(48·서울 강남구 대치동) 씨는 중3 아들이 등굣길에 “운동화가 너무 더럽잖아요” 하고 불쑥 화를 내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느라 혼났다.

며칠 전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양말이며,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에 손톱까지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아들 책상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청소한 것이 화근이었다. 밤늦게 들어온 아들은 제 방 문을 열자마자 돌아서서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 내 물건에 손 좀 대지 마세요.”

박경숙(가명·49) 씨는 얼마 전 고2 아들과 함께 동대문 새벽시장에 옷을 사러 갔다.

아들과 시장 구석구석을 4시간가량 돌아다니면서 박 씨는 묵묵히 계산만 했다. 피곤하고 허리가 쑤셨지만 아들을 위해 참았다. 그런데 이 ‘아들놈’이 한다는 소리가 박 씨를 ‘뚜껑 열리게’ 했다.

“엄마가 백화점 옷 못 사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는 “매번 해 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다”며 “‘나이 든 엄마가 따라다니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생각은 못할망정…”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들이 왕인 상황에서 엄마는 종일 수밖에 없다. 엄마는 쓸개도 배알도 없다. 심지어 아플 수도 없다.

진수정(가명·50) 씨는 지난 주말 몸살감기로 앓아누웠다. 일어나려고 해도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열이 들떠 도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다 큰 맏딸(27)이 “왜 점심 안 차려 주느냐”면서 입이 잔뜩 나와 있는 걸 보고 기가 막혔다.

“난 안 먹어도 좋으니까 네 밥은 네가 차려 먹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자신이 잘못 키운 탓이려니 했다.

윤세창(尹世昌)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주부들은 자식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나 위로가 뒤따르지 않을 때 스트레스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주부 우울증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특히 중년 여성들이 자녀 뒷바라지 과정에서 폐경기를 맞을 경우 빈둥지증후군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식이 대학에 진학한 경우나 결혼을 한 경우에도 기쁨과 함께 심한 허탈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뿌듯하지만 가슴 한쪽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일부 중년 여성은 더욱더 아이들 뒷바라지에 집착한다.

김정원(가명·52) 씨는 출근 준비를 하는 딸을 쫓아다니며 꼬마김밥을 입에 넣어 주곤 한다. 직장에 갓 들어가 힘들고 지쳐 보이는 딸이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그런 엄마 마음은 몰라주고 “입맛 없어. 안 먹는다는데 왜 이래” 하면서 짜증을 부릴 때가 많다.

“딸이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출근하면, 그제야 깨달아요. 멍하게 젓가락을 들고, 내가 뭐하는 거지…. 그래도 다음 날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해요.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요.”

이화여대 함인희(咸仁姬·사회학) 교수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끝없는 자책감을 낳고 적절한 보상이 뒤따르지 않을 때 마음의 상처가 된다”며 “한국의 중년 여성들도 어떤 계기로 자녀와 심리적으로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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