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프리즘]감독들의 말싸움

  • 입력 2006년 4월 7일 07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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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나 농구 선수들은 코트 안에서 온몸을 던져 싸운다. 축구나 야구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죽을 둥 살 둥 뛴다. 하지만 감독들은 선수들보다 먼저 ‘말싸움’부터 벌인다. 소위 ‘장외 신경전’이다. 그 속엔 비수가 번득인다. 살수(殺手)가 숨어 있다. 눈밝은 팬들은 감독들의 말싸움에서 두 팀의 아킬레스건이나 작전을 짐작할 수 있다. 곰곰이 씹어 볼수록 재미있고 웃음도 나온다.

어느 감독은 ‘약점’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문제없다”며 큰소리친다. 어느 감독은 “기둥선수가 아파 큰일났다”고 엄살을 떤다. 어느 감독은 상대 팀의 아픈 데를 다짜고짜 찌르고 들어가며 은근슬쩍 상대 감독의 자존심을 건드려 부아를 돋우는 감독도 있다.

지난달 26일 프로배구 남자 챔피언결정전 2차전(현대 3-0 승리)이 끝난 뒤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과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이 말싸움을 한판 벌였다. 1승 1패(1차전은 삼성 3-2 승리)로 서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 3차전을 앞두고 먼저 ‘코트의 제갈공명’ 신 감독이 포문을 열었다.

“우리 팀은 노장이 많아 체력이 달린 게 패인이다. 상대도 크게 잘하진 못했다. 현대와의 대결은 누가 잘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무너지지 않느냐의 싸움이다. 오늘 경기로 현대캐피탈을 이기는 방법을 깨달았다. 이틀 쉰 다음 맞이하는 3차전에서는 체력을 회복해 승부를 걸겠다.”

신 감독의 말에는 ‘우쭐대지 마라. 우리가 졌지만 현대가 잘해서 이긴 게 아니다. 우리 노장들의 체력만 뒷받침된다면, 현대쯤이야 언제든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이틀 쉬고 하는 3차전은 당연히 우리가 이긴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신 감독의 이러한 ‘말 표창’은 ‘상대 약 올리기’라는 속셈도 있지만, 그보다 김세진 신진식 등 노장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대내용(對內用)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너희들 노장을 믿는다. 너희들이 맘만 먹으면 그까이꺼 현대쯤은 이길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노장들의 자존심에 불을 지른 것이다.

현대 김호철 감독은 발끈했다. 그는 스스로 ‘성격이 못됐다’고 말할 정도로 펄펄 끓는 핏대. 별명도 ‘코트의 카리스마’다.

“무슨 소리냐. 체력도 실력이다. 삼성도 올 시즌 체력담당관을 데려와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았는가. 두 경기를 연속 뛸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프로선수로서 말이 안 된다. 졌으면 졌다고 깨끗이 인정하라.”

김 감독은 삼성의 아킬레스건을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공동묘지 가 봐라. 핑계 없는 무덤 있나. 기술이나 팀워크는 삼성이 최고라고? 그런데 체력이 모자라서 졌다고? 푸하하하, 소가 웃을 일이다.”

결국 2005∼2006 프로배구 남자 챔피언은 현대캐피탈이 차지했다. 김 감독이 이긴 것이다. 하지만 노장들을 이끌고 끝까지 분투한 신 감독도 훌륭했다. 두 감독은 천하가 다 아는 40년 친구. 서로 무슨 감정이 있어 ‘말 표창’을 날렸겠는가. ‘장외 말싸움’ 자체가 게임의 일부인 것이다.

신 감독은 “현대캐피탈과 김 감독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해주고 싶다. 3년 정도 팀을 재정비해 정상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김 감독도 “다른 구단 선수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다음 시즌에는 젊은 선수를 기용하 세대교체를 준비하겠다”고 화답했다.

이래서 스포츠는 아름답다. 승부의 세계는 뒤끝이 깨끗하다. 승부가 끝난 뒤 적장과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은 스포츠뿐이다. 내년 두 감독의 ‘장외설전’은 누가 이길까.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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