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나태주,“몸”

  • 입력 2004년 5월 21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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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태주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눕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뀌더니

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

견디다 못해 전세 돈 빼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

나의 집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고 닦아 준다

- 시집 ‘슬픔에 손목 잡혀'(시와시학사) 중에서

천년만년 살아도 쫓겨날 일 없는 내 집인 줄 알았는데,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남의 집으로 되어 있다면 얼마나 허탈한 일인가?

혈기왕성하던 젊은 때야 남의 일로 생각했지만, 나이깨나 들자 자꾸만 서까래 기울고 방고래 꺼지니 수리비가 수월찮이 든다. 귀밑머리 희어지고 무릎에 바람 들어오니 머지않아 이 집 아주 비워줘야 함을 안다.

서글픈 일이나 진시황도 피치 못하던 일, 그러나 저 일이 어찌 서글픈 일이기만 하랴. 신(神)이 영생(永生)의 감옥에 갇힌 걸 생각하면 때마다 집(몸)을 바꿀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가?

보라, 마른 잎 삭정이들, 해마다 꽃잎 새순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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