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파리의 꿈'…佛 ‘오트쿠튀르 쇼’ 리포트

  • 입력 2004년 2월 5일 15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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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로 고급 맞춤복 의상실을 뜻하는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매년 1월과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오트쿠튀르 쇼를 보러 찾아드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다.

고급 의상을 맞춰 입는 최상류층이거나, 대중에게 패션 소식을 전하려는 취재진들.

대부분의 취재진이나 대중은 한없이 비싼 이 옷들을 만져보지 못한다.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내는 의상 중 상당수는 단지 보여주기만을 위한 것일 때도 많다.

고급문화에 대한 꿈과 환상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드림 팩토리’로, 화려한 외면에 비해 실속이 없다는 점에서 ‘소금 궁전’으로도 불리는 오트쿠튀르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관찰 무대는 지난달 19∼2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4 봄, 여름 여성복 오트쿠튀르 쇼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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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의 꽃다발

오트쿠튀르는 상상력의 꽃다발이다. 기성복처럼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고 만들 필요가 없으므로 예술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다. 또 제품이 시장에 나오기 6개월 전 열리는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컬렉션과는 달리 ‘당장’ 입을 수 있는 것들을 내놓는다. 비슷한 기간 파리에서 열린 남성복 프레타포르테는 올해 연말 의상을, 오트쿠튀르는 올 봄 여름 의상을 선보였다.

오트쿠튀르 쇼는 의상뿐 아니라 모델의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도 드라마틱하다.구체적인 상품보다 '메시지'와 '원형적 이미지'에 승부를 거는 것이 '오트쿠튀르 정신'이기 때문일까. '토렌테'쇼에 선 모델들의 얼굴.

예술성이 강조되다 보니 실용성은 떨어진다. 프레타포르테 쇼 출품작의 10∼20%가량이 시판용으로 대량생산되지만 오트쿠튀르 쇼 의상들은 5∼10%도 고객들에게 입혀지지 않는다.

첫날 열린 ‘크리스티앙 디오르’ 쇼는 이런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브랜드의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는 “최근 여행한 나일강변과 이집트에 마음을 뺏겼다”며 자신의 디자인 콘셉트를 설명했다.

배 부분을 크게 부풀린 골드 드레스에 클레오파트라처럼 짙은 눈 화장을 한 모델들이 허리를 뒤로 젖힌 채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스핑크스 가면, 미라의 붕대 모양 드레스는 고대 이집트의 미녀 왕비 네페르티티, 투탕카멘, 파라오 따위를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 장면에 무대에 오른 갈리아노는 다른 모델들처럼 요염한 자세를 취한 뒤 총총히 사라졌다.

모든 것이 잘 꾸며진 한 편의 쇼였다.

이틀 후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는 일본의 봉건시대 무사를 무대로 끌어들였다. 사무라이 갑옷을 재해석해 드레스로 만든 쇼의 주제는 ‘라스트 사무라이’였다. 고티에답게 아방가르드의 극치를 달렸다.

프랑스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고대 이집트 여인들을 모티브로 제작한 화려한 드레스(왼쪽)와 오스카 수상식 등 '레드 카펫'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은 이탈리아 브랜드 '베르사체'의 드레스.

● 파리 컬렉션의 오늘

유명 오트쿠튀르 디자이너가 제작한 드레스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른다. 그 고객은 전 세계에서 단 200명이라는 것이 패션계의 정설. 중동의 왕족 또는 석유 재벌가의 여인들, 서유럽과 미국 일본의 부호, 할리우드의 A급 배우들로, 손꼽자면 ‘한줌’도 안 된다. 워낙 소수이다 보니 이들의 치수 리스트를 따로 관리하는 디자이너들도 있다.

고객층을 넓게 잡아 400명으로 보기도 한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쇼에 참가한 한국 디자이너 한송씨는 “고객은 400명인데 쇼 참가 디자이너는 40∼50명이나 된다. 그만큼 수익성은 떨어진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래도 대형 패션 브랜드들은 이 쇼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 오트쿠튀르 쇼에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그 명성을 토대로 프레타포르테 쇼에서 상업적 승부를 본다는 게 프랑스 패션계가 가진 이중구조다.

문제는 갈수록 돈벌이가 힘들어지는 소규모 패션업체다. 올해는 10개의 브랜드가 쇼 참가를 포기했다. 때문에 오트쿠튀르가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고급 기성복 수준이 높아지면서 맞춤복 시장이 밀리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오트쿠튀르 쇼를 여는데는 각 디자이너당 70만∼120만 유로(약 10억∼18억원)나 드는데다가 시즌마다 25벌 이상의 새로운 의상을 선보여야하기 때문에 이름 유지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전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자수기계를 사용하거나 노동력이 싼 해외 공장에 의뢰하기도 한다.

이런 추세에 대한 외부 반응은 냉담하다. 인터네셔날 헤럴드트리뷴의 패션 에디터 수지 멘키스는 “이제 오트쿠튀르의 메시지는 대단히 희석됐다. 최고급 맞춤복의 강한 향은 점점 엷어져 이제 ‘오드 투왈렛(희석향수)’이 된 것이다”고 평했다.

어차피 오트쿠튀르의 의의는 딴 곳에 있다는 시각도 있다.

“오트쿠튀르는 ‘드림 팩토리’일 뿐이다. 화려한 쇼로 이미지 관리를 한 뒤 매출은 대중적인 기성복, 화장품 등에서 낸다.” (동덕여대 의상디자인학부 간호섭 교수)

쇼의 성공은 200만 유로(약 30억원)가량의 광고 효과를 보장한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기자만도 1000여명에 육박한다.

하지만 젊은 디자이너들은 ‘오트쿠튀르 의상도 돈이 돼야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미국 디자이너 랄프 루치는 이번 쇼에서 낮에도 입을만한 우아한 외출복을 내놓았다.

“오트쿠튀르가 연극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 싶었다.”

● ‘프랑스’를 사수하라

오트쿠튀르는 프랑스 고급문화의 자존심이다. 이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전통 브랜드들이 조바심을 내고 있다.

온통 밝고 알록달록 색상들로 만든 드레스들을 선보인 크리스티앙 라크로아는 자신의 쇼가 일종의 ‘성명서(manifesto)’였다고 말한다. 그 성명의 내용은 “우리는 위협받고 있는 프랑스 문화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역시 그랬다.

“내 쇼가 정말 ‘프랑스답기’를 바랐다.”

그가 선보인 웨딩드레스는 70만개의 진주를 1000시간에 걸쳐 꿰매 붙인 옷이다. 상체를 길고 늘씬하게 표현한 이브닝드레스의 라인은 이 브랜드의 창시자 코코 샤넬의 작품을 재현한 듯 했다.

오트쿠튀르는 1858년 프랑스에서 현대 고급 의상실 문화를 정립한 찰스 프레드릭 워스가 시작한 새 시스템이자, 개혁이었다. 그 이후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단순한 재단사가 아닌 패션 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오트쿠튀르는 쉽게 허물어지는 ‘소금 궁전’이 되고 말 것인가.

이번 쇼를 본 프랑스의 유명 패션 전문가 장 자크 피카르는 “오트쿠튀르는 예술의 한 장르다. 또 동시에 시대상을 가장 잘 반영하는 거울이다”라고 말했다. 오트쿠튀르가 존재해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파리=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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