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⑨]압구정

  • 입력 2002년 6월 6일 23시 33분


압구정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에 있던 정자다. 남쪽에서 우면산 자락이 밀고 올라와 북쪽의 남산 자락인 응봉(鷹峯)과 마주보며 한강의 물목을 좁혀 놓은 곳의 끝부분에 세워져 있던 정자다. 원래 이곳 응봉 아래를 휘감아 도는 한강 기슭은 두무개 혹은 동호(東湖)라 하여 경치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래서 중종(1506∼1544) 때부터는 독서당(讀書堂·젊고 재주 있는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던 집)을 이곳에 두기도 하였다. 이런 두무개 맞은편 강변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정자를 세웠으니 이곳에 올라앉으면 서울 강산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이에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의 모사가 되어 왕위를 찬탈하게 했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일찍이 이곳을 차지하고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정계에서 은퇴하여 이곳으로 물러 나와 갈매기와 더불어 여생을 한가롭게 보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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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무명 서생(書生)이던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김종서(金宗瑞·1390∼1453)와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 등 조정 대신과 왕자들을 죽이고 수양대군이 대권을 찬탈하게 한 다음 도합 4회의 정변을 성공시켜 그때마다 일등 공신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가 1등 공신이 될 때마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 박팽년(朴彭年·1417∼1456), 남이(南怡·1441∼1468) 등 충의열사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삼족이 멸문당하는 참화를 입었다. 이런 권간(權奸·권세를 가진 간신)이 군자의 흉내를 내어 압구정을 지었으니 소가 웃을 일이었다.

차라리 이런 잔꾀를 부리지 말았더라면 역사 속에서 잊혀지기나 했으련만!

인과(因果)의 법칙이 한명회라고 비켜갈 리 없다. 죽은 뒤에는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에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尹)씨의 사사(賜死) 주모자로 부관참시(剖棺斬屍·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베는 형벌)의 극형을 받는다. 재산도 몰수되어 국고로 환수되었으니 압구정도 주인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누가 주인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정자만은 팔작집의 큰 규모로 언덕 위에 덩그렇게 지어져 있다. 그 아래로 층층이 이어진 강변 구릉 위로 기와집과 초가들이 마을을 이루며 들어서 있다.

기와집은 서울 대가집들의 별장일 가능성이 크다. 잠실 쪽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본 시각이기 때문에 압구정동 일대와 그 맞은편 기슭인 옥수동 금호동 일대가 한눈에 잡혀 있다. 바로 강 건너가 독서당이 있던 두무개이고, 그 뒤로 보이는 검은 산이 남산이다. 정상에 큰 소나무가 서 있는 것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그 큰 소나무가 그렇게 서 있었다 한다. 압구정동 뒤로 보이는 먼 산은 관악산 청계산 우면산 등일 것이다.

이 압구정은 여러 손을 거쳐 조선 말기에는 철종의 부마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1861∼1939) 소유가 되었는데 박영효가 갑신정변(1884)의 주모자로 역적이 되자 몰수되어 정자는 파괴되고 터만 남는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곳은 경기 광주군 언주면(彦州面) 압구정리라 했으나 1963년 1월1일에 서울시로 편입되어 압구정동이 된다. 1970년대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일대가 아파트 숲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압구정 자리는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해당한다.

영조 17년(1741)에 비단에 채색한 20.2×31.3㎝ 작품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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