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부른다/전남]작가 이청준씨가 말하는 내고향

  • 입력 1998년 7월 30일 19시 26분


해가 바뀌고 철이 바뀔 때마다 나는 내 남쪽 고향동네 여행계획으로 한바탕씩 몸살을 앓곤 한다. 무엇인지 늘 빚진 느낌을 갖게 하고 주뼛주뼛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게 하는 탓에 끊임없이 다시 찾아가 마음을 바쳐 묻고 너그러운 품을 빌려야 하는 그 고향길닦이 길.

그러니 자연 그 행정(行程)의 첫 계획은 늘 욕심을 부리게 마련. 그때마다 버릇처럼 여정을 함께해간 친구들을 위해 나는 우선 생각키는 대로 구례의 화엄사나 승주의 송광사, 해남의 대둔사같은 명산 대찰들부터 두루 찾아 보여 주고 싶기도 하고, 녹동이나 회진, 완도 앞바다 어디쯤에서 하루쯤 한가로운 바다낚시를 즐기게 해 주고 싶기도 하다.

여행길엔 으레 새로운 경관과 좋은 섭생이 우선이라 강진만의 마량포구, 진도 연륙교 아래의 울돌목 큰여울물살 따위 다도해 특유의 연해경관을 구경하며 고을고을 푸근한 인심과 맛갈스러운 음식차림을 실컷 즐기게 해주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일정이 한 주일도 모자란다. 그래 대개는 3박4일이나 2박3일 정도의 짧은 일정에 맞춰 거듭거듭 계획을 다시 짠다. 그리고 종국에 내 여행계획의 핵심은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정서와 품격, 일종의 문화기행쪽으로 급하게 압축되는 게 예사다. 산하의 자연과 물산이 인정과 풍물을 낳고, 그 인정과 풍물이 일정한 지역문화의 정서를 낳는다면, 그것을 찾아 만나는 것이 그곳의 삶 모든 것을 만나고 누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기회가 내게는 무엇보다 떳떳하고 즐거운 고향길닦기의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도 일정이 역시 만만찮다. 이 고을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와 품격은 한 마디로 그 일상화된 삶의 여유와 멋과 흥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듯싶다. 그런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대충만 하여도 한국 남종화와 아리랑과 씻김굿의 고향 진도를 찾아 보아야 하고 우리 차와 강강술래, 윤고산 시가의 요람지 해남과 완도, ‘목민심서’와 다산초당의 강진고을,남도소리의 보고 장흥과 보성을 찾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주의 반남 고분군, 영암 월출산자락의 무위사, 화순의 운주사들도 찾아보고 우리 조상의 위혼과 불심의 비밀을 되새겨 보고 담양의 소쇄원과 식영정, 정철 유적지들도 찾아가 선인들의 삶의 멋과 지혜를 느껴 보고, 더하여 먼발치로나마 의재 허백련 선생의 춘설헌을 품어 안은 광주의 무등산을 우러러 그 꾸밈새없는 위엄과 편안한 지령(地靈)까지 누려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이번에도 일정이 전혀 어림없게 마련. 나는 거듭 내 전문 관할지역이라 할 태생지 장흥이나 해남 등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행로를 최대한 능률적으로 연결지어 보려 고심하지만 결과는 늘 마찬가지. 실제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올 무렵이면 언제나 “이번에 빠진 곳은 언제 한번 기회를 내어 다시 오지 뭐”하는 식의 아쉬운 소리를 남기게 되고, 그리고 오래잖아 나는 또 새 고향길을 몇번씩 다시 계획하며 지병처럼 호시탐탐 동행을 모으는 일에 골몰하고 드는 것이다.

이청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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