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천재 이창호 ⑥]「하늘이 내려준 스승」조훈현 9단

  • 입력 1998년 6월 18일 09시 00분


이창호(李昌鎬)9단의 책상 서랍에는 봉투가 하나 들어 있다. 5월15일, 스승의 날. 조훈현(曺薰鉉)9단에게 전해 드리려 몇십만원인가를 챙겨 두었던 것.

소년기 6년 반 세월을 돌봐준 조9단과 ‘작은 엄마’라 부르는 조9단의 부인 정미화(鄭美和)씨. 어느덧 병역까지 마친 성년 이9단이기에 더욱 생각이 났을 것이다. 물론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말라”는 평소 아버지 이재룡(李在龍)씨의 충고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스승의 날, 그는 스승과 한 타이틀을 놓고 결승대국을 벌였다. 졌다. 타이틀은 조9단에게 갔다. 올들어 첫 타이틀이었다. ‘창호가 선생한테 큰 선물을 했군’하는 농담도 나왔다. 프로세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정이 어찌됐건 사은(師恩)의 봉투는 아직 그대로다. 아마도 아버지가 전주에서 올라와 대신 전해줄 때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착한 청년이 스승께 바치고자 했던 감사의 뜻은 벌써 전해졌으리라.

만 아홉살의 초등학교 3년생 이창호.그는 어깨동무 어린이바둑왕대회에서 우승, 바둑 신동(神童)소리를 들었다. 하나 언제 프로에 입단할지, 아니 입단이 가능할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한마리 ‘고양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주에서 일기 시작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이내 서울의 기계(棋界)에 상륙했다.

‘고양이는 무슨… 틀림없는 호랑이 새끼랑께….’

84년 4월 어느 날. 조훈현9단의 집을 누군가 두드렸다.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이창호를 원정지도하던 전영선(田永善)7단이 당대 제일의 고수(高手) 조훈현에게 ‘물건 좀 봐주시요’하며 나타난 것. 석점을 깐 이창호는 첫판은 졌으나 두번째 판을 이겼다.

“그이는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 같았어요.”

조9단의 부인 정씨는 당시 남편이 바둑을 지고도 흐뭇해하던 일을 기억한다. 실로 이 만남이 한국바둑사, 나아가 세계바둑판도를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음은 몇년 되지 않아 밝혀진다.

아무도 깨지 못한 아홉살 프로입단. 이후 한국 최초의 9단, 국내 전관왕 등등. 당시 31세의 조훈현은 거칠 것이 하나 없었다. ‘제비’란 별명을 얻었던 날랜 행마 솜씨 못지 않게 그는 남들에 앞서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다. 한국바둑의 미래를 열어갈 새 인물을 직접 데려다 키우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바둑문화사의 ‘신포석(新布石)’이었다.

두 달 뒤 전주에 내려가 이창호와 지도기를 두며 역시 ‘물건’임을 확인한 조훈현은 이창호를 집안 식구로 맞아 들였다. 근대 바둑 역사 4백년의 일본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한국 바둑계로서는 최초의 내제자(內弟子)였다. “조국수가 새끼 호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네.”

바둑세계 사람들은 천하제일의 조훈현이 내제자를 키우게 된 데 대해 전율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끝장 아닌가’하는 불안과 공포였다.

과연 고양이가 아니었다. 이창호는 그로부터 2년뒤 프로 입단,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더니 6년 뒤 세상을 향해 포효했다. 바둑계 일인자의 상징이 돼온 국수위(國手位)를 스승 조훈현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내제자 시절 초기 이창호 집안 사람들은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집에 같이 있던 창호 조부께서는 아무래도 일주일에 한 판 쯤은 직접 배우지 않겠나 생각했었나 봅니다. 창호도 할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 ‘그게 아니다’고 얘기 해주었지요.” 아버지 이재룡씨의 말이다.

조훈현의 생각은 달랐다. 열 살 때부터 10년간 내제자 생활을 하는 동안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선생이 직접 상대해준 바둑은 불과 서너판. 복기(復碁)를 시켜 문제점을 지적해주는 ‘포인트’ 위주의 방식이었다. 그는 ‘세고에 방식’을 모델로 삼았다. ‘이창호 정도의 그릇이라면…’하는 믿음도 작용했다.

바둑은 커도 아이는 아이. 86년 이창호의 조부 이화춘씨가 작고할 때까지 이창호의 부친과 조부는 며칠씩 교대로 조9단 집에 머물며 뒷바라지를 했다.

내제자 시절 이창호의 식사 습관도 변했다.비만에 가까운 체질이었음에도 이창호는 육류와 햄 소시지 오뎅 등을 좋아했다. 하지만 생선을 즐기는 스승 조훈현의 식단에 점차 적응해 나갔다. 정미화씨는 “아무래도 남편 위주로 식단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창호는 지금은 음식을 거의 가리지 않는 편이다. 키 1백70㎝ 몸무게 65㎏의 적당한 몸집은 어쩌면 내제자 시절 거둔 망외(望外)의 소득인지 모른다.

6년 반의 세월이 흘러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4단이었던 이창호는 최고위 타이틀에 이어 국수위마저 스승으로부터 양위받았다. 5단 승단 때 혹은 고교졸업 때로 예정했던 ‘하산’시기를 더는 미룰 수 없게 됐다. 92년 2월 그는 스승의 곁을 예정보다 3년 이르게 떠났다.

이창호는 스승에게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스승이 주최하는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가하는 행동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하늘이 맺어준 스승과 제자, 조훈현9단과 이창호9단. 바둑으로 드러난 이 현묘(玄妙)한 인연의 세계.

절세(絶世)의 바둑영웅이자 사제지간인 두 인물에 대한 전설은 오래도록 바둑세계에 남을 것이다. 현재 45세 조훈현과 23세 이창호, 두 사람은 아직 신화 속으로 사라질 때는 아니다. 프로세계를 호흡하는 한, 반상을 지킬 기력(氣力)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앞으로 20년은 기예(棋藝)를 겨룰 수 있다.

세월이 지나 이창호가 또 다른 ‘조훈현’이나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일 날이 올지 모른다. 그 날 이창호는 진정 따뜻한 가슴으로 그리워하리라. 자신을 발견하고 더없이 기뻐했고 그 기쁨이 부담으로, 괴로움으로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던 스승 조훈현의 사랑을.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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