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를 바꾼 발명품을 뽑으라면 총을 추천하겠다. 전문가들은 자기 영역이 중요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펜이나 붓이 총보다 더 큰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총을 지지한다.
총은 전투 방법만 바꾼 것이 아니다. 이전에 기사나 무사를 양성하려면 10년, 20년의 수련이 필요했다. 총은 3주 훈련이면 더 강한 병사를 만들어 낸다. 이로써 전쟁에 존재했던 신분 장벽이 깨졌다.
근대 민주주의가 성립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사람들이 간과하는 요인이 전쟁의 신분 장벽이다. 인류가 처음 공동체를 만들고 누군가에게 권력을 부여할 때는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권력자에게 복종한 것이다. 그중에서 최우선의 필요가 공동체의 생명과 재산 보호였다.
사자 무리의 수컷은 도전자에게 패배하면 무리에서 떠나야 한다. 더 이상 무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을 비롯해 유럽 왕가, 영주의 문장(紋章)에 유독 사자가 많은 이유도 권력의 이런 속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존중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고귀한 정신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다. 권력의 근원이 힘을 잃으면 무리에서 떠나야 하는 사자의 숙명과 맞닿아 있다는 자각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권력과 특권은 보호의 의무를 통해 가능했는데, 총이 그 보호의 능력을 대중에게 개방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악해서 사자의 운명을 비켜가는 법도 찾아냈다. 그 결정체가 국가다. 국가와 관료조직은 책임 회피의 수단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이 나면 왕과 문관은 도망쳐도 권력에 손상을 입지 않았다. 장군과 병사에게 책임을 돌리면 된다. 우리 역사를 보면 국가가 일찍 발달한 덕분에 이 요령도 너무 일찍 깨달았다. 이제 와서 봉건제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사자 문장을 도입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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