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책상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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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출판평론가
표정훈출판평론가
  ‘밤은 고요하고 서재는 차가운데 창밖엔 눈이 소복. 서안 비추는 등잔 하나, 서안엔 옛사람의 책 하나. 옛사람은 가고 없어 나를 일깨우는 건 옛 책이어라.’

 홍우원(1605∼1687)의 시 ‘야좌독서(夜坐讀書)’의 구절이다. 조선 선비의 책상, 즉 서안(書案)은 나뭇결 좋은 목재를 취하여 화려한 칠이나 장식을 삼가고, 책 한두 권 펼쳐 놓을 만한 크기로 소박하게 만들었다. 글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특별한 책상으로 독책상(讀冊床)이 있었다. 국왕, 왕비, 대비 등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에서, 송덕문이 새겨진 옥으로 만든 책을 독책상에 올려놓고 낭송하였다. 독책상을 담당하는 임시직으로 독책상 차비(差備)를 두기까지 하였으니, 이토록 귀하게 다룬 책상도 드물 것이다. 1856년 상유현(1844∼1923)이 봉은사에서 추사 김정희를 만난 일을 적은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에 선비의 서안 풍경이 묘사돼 있다.

  ‘서안 위에 뚜껑 덮인 벼루 하나, 푸른 유리 필세(붓 빠는 그릇)가 있다. 발 높은 작은 향로에서 연기가 오른다. 필통 하나는 자줏빛으로 크고 다른 하나는 희고 작다. 그 사이에 백옥 인주합과 청옥 서진(書鎭)이 있고, 먹을 갈아 연지에 그득한 큰 벼루 하나가 더 있다.’

 파리 보주 광장 근처 빅토르 위고 기념관에는 위고가 사용한 책상 여럿이 전시돼 있다. 영국령 건지 섬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마련한 책상에는 네 귀퉁이에 각각 조르주 상드, 알렉상드르 뒤마, 알퐁스 드 라마르틴 그리고 위고 자신의 사인이 새겨져 있다.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까지 함께한 책상, 애인 쥘리에트에게 준 책상도 있다. 책상은 위고의 분신이었다.

 작가에게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책상은 어떤 의미일까. 슈테판 츠바이크가 ‘발자크 평전’(안인희 옮김)에서 오노레 드 발자크의 책상을 말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 중 가장 비싼 것보다 더 사랑하였다. 책상은 그의 가장 깊은 즐거움과 가장 힘든 고통의 유일한 친구였으며, 그것만이 그의 참된 삶의 증인이었다.’

 작가 박경리에게 책상은 삶의 버팀목이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시 ‘옛날의 그 집’) 원고지와 펜은 컴퓨터로 바뀌었어도 책상만은 의구하다. 책과 사람을 잇는 가장 오래된 인터페이스, 책상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야좌독서#서안#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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