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日月이 나를 낳으리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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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94호 백자 청화철사진사국화무늬 병.
국보 294호 백자 청화철사진사국화무늬 병.
日月이 나를 낳으리라 ―노향림(1942∼)

해와 달을 닮은 한 여자
이 땅에 태어났노라
흙과 바람과 향기와 부드러움의
상생으로 한 생을 빚어
일월이 나를 점지한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그 이름은 하도 둥글고 고혹해서
나는 한 천년을 더 기다리노라
하늘 향해 살짝 벌린 젖은 입으로
칠월 칠석 은하수를 마시며
그 아득한 천년의 세월 견디었노라
격랑의 역사 헤치고 나올
한 남자 기다리노라
먼 북방까지 올라가 우리 얼 그 기개
활짝 펼쳤던 먼 광야의 남자
말갈기 휘날리며 올 한 남자 기다리노라
내 몸의 백자 철사 국화 줄기
그 아름다움 빛바래어 사라져도
국화 향을 온 천지 피워내
그 향기 가시지 않는 조선의
한 여자로 다시 태어나겠노라
서늘한 옥빛 가을 하늘 닮은
아름다움 품어 나는 다시
이 땅에 태어나겠노라


설날 아침의 해는 이 겨레의 소망, 축복으로 더 크게 떠오른다. 고향의 어버이를 찾아뵙고 조상께 차례 올리고 성묘를 하기 위해 민족 대이동에 나서는 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축제에 하늘인들 어찌 넘치는 복을 내리지 않으랴.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 우리 조상들은 백자 병에서 술을 따라 잔에 부었었다. 여기 조선백자가 그 몸뚱이에 치장할 수 있는 온갖 손재주며 쓸 수 있는 기법을 다 써서 완성시킨 ‘백자 청화철사진사국화무늬 병(白磁靑華鐵砂辰砂菊花文甁)’도 필시 나라님이 설날 차례상에 명주를 담아 올렸으리라.

한 자 네 푼의 훤칠한 키에 국화 난초 벌 나비를 양각으로 새기고 그 위에 철사, 진사를 알맞게 발라 도자예술의 극치로 이 대작을 뽑아낸 도공은 누구였을까? 가마의 불을 식힌 후 흙벽을 헐어 머릿속에 그리던 해 같고 달 같던 얼굴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아마도 황홀한 통곡을 터뜨렸으리라.

인류가 받드는 예술품은 거기 에워싼 가슴 뭉클한 이야기도 따르는 것. 1936년 11월 경성미술구락부 고미술품 경매장에 소문으로만 듣던 이 백자가 나왔다. 저축은행 일본인 행장이 내놓았는데 시작가가 500원이었다. 당시 장안의 큰 기와집 반 채 값, 그러나 곧 20배를 넘어 1만 원이 넘어섰고 일본인 골동상 야마나카와 우리 문화재 수호자 간송 전형필의 경합이었다.

야마나카는 1만4550원에서 기권, 30원을 더 붙인 1만4580원에 낙찰, 이 문화유산을 지켜냈다. 서울의 큰 부잣집 열다섯 채면 요즘 시세로 몇 백억 원은 될 것. 시인은 “그 향기 가시지 않는 조선의/한 여자로 다시 태어나겠노라”고 기꺼이 이 전설의 백자와 한 몸이 되려 한다.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日月이 나를 낳으리라#노향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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